Into the blue

2021.09.03. - 2021.10.05.


Artist. Heekyoung Jeon

전희경이 그려내는 풍경은 어딘지 모르게 불안을 암시한다. 작가는 피안으로 상정한 어떤 풍경, 어떤 장소, 어떤 곳을 2차원 평면 위에 원근 없는 공간으로 그려낸다. 흔히 추상으로 분류되는 회화들이 으레 그렇듯, 전희경의 회화 역시 그 안에 담긴 내용이나 지시 대상이 분명하지 않아 재현의 범주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어디에서도 본 적 없는 이 세계는 작가의 내면으로부터 도출된 것이다. 하지만 외부 대상이 아닌 내면의 정신적 동기로부터 파생된 이 ‘풍경’들이 지시하는 것은 의외로 <상상의 계곡>(2015)이나 <비와 물>(2015), <달>(2020)과 같이 자연의 어느 것이다. 그러나 전희경의 작업에서 자연의 모습이 처음부터 전면적으로 등장했던 것은 아니다.

2013년, 108개의 드로잉으로 완성된 <Practice being human>(2013)은 그 개수에서부터 불교에서 말하는 백팔번뇌를 암시하고 있다. 백팔번뇌를 산출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중에서도 교리적 해설이 가장 두드러진 방식을 따르자면, 머리로 이해하여 지혜로부터 얻은 지식과 관련된 견혹(見惑)의 88개의 번뇌와 정서, 의지와 관련된 수혹(修惑)의 10가지 번뇌가 더해져 합이 98개, 여기에 마음의 어리석음이 낳은 보다 근본적인 10개의 번뇌를 합해 도합 108개를 이루고 있다고 한다. 견혹은 바르게 보기만 해도 곧 깨닫고 사라진다고 하여 ‘견도소단혹(見道所斷惑)’이라 불리고, 수혹은 쉽게 사라지지 않고 좀처럼 바뀌지 않기 때문에 거울을 닦듯이 다스려야한다고 하여 ‘수도소단혹(修道所斷惑)’이라 불린다.

작가가 단절하고자 했던 의심과 의혹, 갈등과 번뇌의 원인이 무엇인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하지만 추측하건대 작품의 제목에서 읽어낼 수 있듯이 그것은 아마도 ‘인간되기’ 혹은 ‘인간답게 살기’라는 실천적 명제와 가까운 것이 아니었을까.

이것은 과연 인간답게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묻는 자전적 메시지이자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스스로에게 되새기는 자조적인 결심이다. 그리고 여기에 사회적인 서사가 덧붙여진다. 작가는 사회에서 요구하는 ‘인간됨’의 조건과 그에 부합하지 못하는, 혹은 만족하지 못하는 자신에게서 느껴지는 절망과 결핍을 바라본다. 그리고 이를 수행하듯 덤덤한 모습으로 받아들이는 과정을 108개의 드로잉으로 풀어낸 것이다. 그러므로 <Practice being human>은 번뇌로부터 흐트러진 마음을 다스리는 수행과 부단한 연습의 결과이자 ‘인간답게 살고 싶다’라는 본인의 의지가 담긴 108개의 자화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자기-수행적 드로잉은 <To be a man>(2013)까지 연결된다.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불교적 교리의 흔적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는데, 부처의 수인(手印)을 모티프로 한 형상이 그렇다. 붉은색 종이 위에 꽃처럼 피어나는 형상으로 수인을 각기 다른 방식으로 그려낸 이 드로잉 연작은 전희경의 초기작부터 종종 등장하곤 했었던 알 수 없는 생명체를 떠올리게 한다. 이 알 수 없는 생명체는 한동안 사라진 듯 보이지 않다가 다시금 나타나 꿈틀거리는 그 모습이 마치 번뇌의 원인인 인간의 욕망과 닮아 있다. 작가가 그토록 끊어내려 했던 번뇌가 결국 다시 자신을 붙잡고 있는 모양이다. 그것도 열반에 다다른 부처의 수인과 같은 모습으로 재등장한 것이 사뭇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욕망은 언제나 재등장을 통해 자신의 위치를 확인할 뿐이다.

또한 언뜻 기도하는 손 같기도 한 이 드로잉들 역시 무언가에 대한 바람과 염원의 의미가 담겨져 있다는 점에서 <Practice being human>과 상통한다. 욕망은 번뇌와 같이 벗어나고자 하는 대상이자 동시에 염원의 대상이다. 결국 삶이란 무언가를 희망하는 것에서부터 기인하지만, 이는 다른 한편으로는 갖지 못한 현실에서 출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회적 요구와 현실적 삶, 그리고 작가로서의 이상. 이 모든 것이 전희경이 자신의 작업을 통해 끊임없이 말하고자 하는 이상과 현실 사이를 관통하는 간극의 기저이지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 작가가 이야기하는 간극의 양극단 중 한 쪽을 차지하고 있는 이 ‘이상’을 굳이 유토피아적 희망의 세계라고 단언할 수는 없다. 이것은 모든 것이 충족된 완벽한 세계가 아니라 그저 앞으로 나아가야할 곳이자 방향으로, 영원히 좁혀지지 않는 불일치의 틈새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불일치의 틈새, 간극의 발생지가 바로 욕망이고 번뇌이다. <Practice being human>은 전희경이 말하는 간극과 불일치의 원인을 자기 자신에게서 찾은 첫 번째 시도이자 작가로서 작업의 전환을 알리는 일종의 신호이기도 하다.

전희경은 간극과 사이 공간을 그린다. 현실과 이상 사이의 괴리감이 그 사이에서 방황하며 정착하지 못하고 부유 한다. 이 메워지지 않는 괴리감의 틈이 바로 ‘빈 공간(void)’이며, 이는 곧 욕망이 머무르는 공간이다. 욕망은 정확한 좌표를 찍지 않고 떠다니기 때문에 여기저기 부유하고, 채워지지 않는 갈증이 욕망의 원동력이기 때문에 ‘갖지 못한 현실’이 욕망을 불러일으킨다. 이것이 전희경의 풍경이 불안을 암시하는 이유이다. <상상의 계곡>(2015)이나 <이상적 삶 2>(2015)와 같은 작업에서도 마찬가지로 작가는 계속해서 괴리감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러나 이전과 조금 달라진 것이 있다면,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느껴지는 괴리감에 대한 원인이나 고민을 찾아 나선다기 보다는 그 간극을 하나의 공간으로 보여주는데 주력하는 듯하다. 그리하여 점차 자연에 더 주목하고, 그것을 일종의 풍경으로 제안한다.

전희경의 회화가 지시대상이 불분명한 추상임에도 불구하고 풍경으로 읽을 수 있는 단서는 충분하다. 먼저 붓이 만들어내는 공간감이 있다. 확실히 이전과는 달리 캔버스 위를 부유하는 듯한 붓의 제스처가 더욱 선명하게 눈에 들어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는데, 2017년쯤부터는 붓의 사용이 더욱 과감해지고 다양해진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붓의 필치에서 느껴지는 강한 제스처는 전희경만의 고유성을 나타내기도 하지만 그만큼 붓의 궤적을 고스란히 담고 있기 때문에 독특한 3차원 공간을 만들어낸다. 이를테면 <바람에 대한 연구>(2019)에는 커다란 붓 자국이 화면을 가로지르는 것을 볼 수 있다. 그 안에는 붓의 시작과 끝이 또렷하게 각인되어 압축된 붓의 면적이 공간처럼 겹쳐 보인다.

그러나 이것이 지시하는 바는 여전히 애매한 채로 남아있다. 단지 작가가 제목을 통해 심어놓은 단서를 쫓아 그저 이것이 ‘자연의 어느 것’ 혹은 ‘어딘가’라고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이는 전희경의 회화가 풍경을 암시하는 또 다른 이유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작가는 임의로 설정한 제목에서 바람, 공기, 물과 같이 형체가 불분명한 자연의 일부를 직접적으로 드러내거나 <바다가 덮는 이른 새벽>(2020)이나 <물방울이 모이는 세계>(2020)와 같이 은연중에 어떤 장소나 시간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렇지만 “산이나 들, 강, 바다 따위의 자연의 모습”이라는 풍경의 사전적 정의와 이렇게 전희경이 텅 빈 공간에 쏟아내는 풍경은 일치하는 듯 하면서도 교묘하게 어긋난다.

시각 중심적인 사고가 뿌리 깊게 내려앉은 서구 역사 속에서 풍경은 주체, 즉 관찰자가 바라보는 대상의 ‘일부’였다. 그러므로 풍경은 주체의 시각에 의존해 어떤 관점 아래 제공되었고, 이는 주체와 대상간의 긴밀한 결탁으로 유럽 중심의 서구 역사 속에서 구조화되었다. 본다는 것은 이성적인 사고의 이해를 함축하고 있다. 이성은 감각의 자유를 방해하고 고립시킨다. 흔히 우리가 상상하는 풍경화의 과학적 구도가 알 수 없는 세계에 대한 접근을 방해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풍경을 ‘바라본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바라봄의 주체와 대상의 구분이 세계에 대한 접근을 가로막는 것은 아닌가. 그런 의미에서 전희경의 풍경은 주체와 대상간의 구분이 없다. ‘자연의 모습’이라기엔 너무나 작위적이고, 그저 감정의 표현이라기엔 어딘가를 암시한다. 그러므로 그가 <산수화>(2014)나 <몽상도>(2014)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동양의 산수나 무릉도원 같은 것에 흥미를 느낀 것은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작가가 그려내는 간극은 주체와 대상의 구분이 없는 작가 고유의 내면 세계의 발현이다. 실질적 지시대상의 부재와 물리적 세계에 대한 재현의 거부는 현실과 이상의 간극 앞에 선 어느 한 인간의 막연함을 어떠한 동요도 없는 고요함, 심연과도 같은 짙은 파랑색으로 치환한다. 하지만 초기부터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파란색에 대해서 작가는 함구한다. 주로 강이나 바다, 바람 같이 자연의 일부에서 떠오르는 막연한 이미지에서 파란색을 추출하기 때문에 전희경이 주로 쓰는 파란색은 정해져 있지 않고 자유로우며, 하나의 색으로 한정되지 않는다. 파랑의 경계에 있는 모든 색이 자연의 결정되지 않은 형상으로 다가오기에 전희경의 풍경은 이성이 지배하는 재현의 세계 바깥에 있는 것이다.

키에르케고어는 “입을 크게 벌린 심연을 우연히 내려다보는 자는 현기증을 일으킨다”1)라고 말하며 불안을 심연을 바라보는 자가 느끼는 현기증에 비유한다. 작가는 괴리감에서 느껴지는 막연함과 불안이 어떠한 동요도 없는 고요한 상태에 이르기까지, 번뇌를 다스리는 행위를 캔버스에 쏟아낸다. 스스로 충만한 고요와 안락한 세계, 이것이 작가의 염원이자 스스로 도달하고자 하는 이상이 아닐까. 그러므로 전희경에게 그림을 그리는 행위는 여전히 자기-수행적이다. 심연과도 같은 파랑을 향해(into the blue) 가는 여정이자, 알 수 없는 저 먼 곳으로(into the blue) 나아가는 과정이다.

 

전희경은 최근 어느 한 인터뷰2)에서 자신을 “파란색 같은 사람”이라고 소개했다. “물 같이 시원하고 자유롭게 사는 것을 꿈꾸지만 막상 바다의 심해 같은 데에 가라앉아 있는 사람”이라고. 이어서 삶에서 가장 관심이 많은 단어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한 대답도 퍽 흥미롭다. 그는 “밸런스”라고 말했는데, 이는 마치 자신이 그려내는 양극단 사이에서 자기 자신의 실존을 유지하기 위한 조용한 투쟁 같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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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이슬비

1) 쇠렌 키에르케고어, 『불안의 개념』, 임규정 옮김, 서울; 한길사, 2016. p.198.

2)  https://www.tentothen.com/20t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