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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urry Ways
2022.04.01. - 2022.04.24.
Artist. Heoang Kim
가까웠지만 아무데도 없는 세계
1990년대 중후반, 집집마다 개인용 컴퓨터 소지가 늘고 인터넷 보급이 활성화 되면서 당시 아이들 중 일부는 늘 학교가 끝나면 바로 집으로 돌아가 컴퓨터를 켜고 다른 세계에 들어갔다. 그들은 픽셀로 이루어진 납작한 화면을 세계로 인지했다. 전혀 다른 세계를 헤집고 다니면서 생각하고, 경험하고, 친구들을 만나면서 그 세계의 질서를 익혔다. 롤플레잉(Role Playing) 게임의 일종인 MMORPG는 여러 명의 플레이어가 동시에 같은 게임 서버에 접속하여 그 안에서 관계를 형성한다. 때때로 이것이 누군가에게는 레벨을 높이는 것보다 중요하기도 하고, 그 자체가 레벨 업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요소가 되기도 한다. 어쨌든 플레이어는 이 알 수 없는 ‘이세계(異世界)’에 동화되어, 너무나 쉽게 드나들 수 있었다.
97년 일본의 TGL 사에서 발매한 <마법사가 되는 방법>이라는 게임 역시 롤플레잉 육성 시뮬레이션 중 하나로 플레이어가 여러 미션을 수행하면서 스토리가 전개된다. 게임의 최종 목적은 캐릭터를 성장시켜서 마침내 ‘마법 마스터’로 만드는 것인데, 그 과정이 쉽지만은 않다. 이를 위해 약초를 채집하고 여러 재료를 조합하면서 마법을 익히고, 목표를 위해 쉬지 않고 수련해야 한다. ‘마법사’라는 동기, 탐험과 모험, 관찰, 성장을 위해 주어지는 ‘미션’과 ‘퀘스트’, 이를 수행함에 따라 얻게 되는 ‘아이템’이라는 적절한 보상과 함께 지루해질 때 즈음 ‘이벤트’가 등장한다. 그리고 ‘레벨’을 통해 눈으로 성장하는 것을 확인하며 느끼는 안도감과 성취감이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단순하지만 평화로운, 소박하기 짝이 없는 BGM이 게임 속 시간을 여유롭게 만들어주었다.
아이는 이 세계에서 공격, 탐색, 조련, 창조, 자연, 자연 변화 등의 여러 마법을 다룰 수 있다. 마법사의 숲을 지나 바다가 보이는 커다란 절벽에 다다르고, 얼음성과 동쪽의 가시나무 숲까지, 늘 언제나 곳곳에서 모험이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이내 이 8비트의 단 256개의 색으로 이루어진 세계 속의 일부가 된다.
이곳에서는 현실과는 전혀 다른 계절이 흐른다. 땅, 불, 바람, 물, 황혼, 그리고 다시 땅으로 되돌아가는 고유한 절기가 이 세계의 흐름이자 시간의 좌표이다. 땅에서 다시 땅으로, 현실 세계에서 인간에게 가장 익숙한 시간관이 선형적이라면 이 세계의 시간은 순환적이며 은유적이다. 계절의 바뀌는 것이 시간의 흐름을 보여주지만 이곳은 엄연히 현실과는 다른 세계, 성장은 하지만 멈춰있는 세계이다. 게임 속 시간은 쳇바퀴처럼 같은 곳을 맴돌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아이는 약초를 구하러 이 세계 곳곳을 헤집고 다니면서 시간 가는 줄을 모른다. ‘땅의 시’, ‘불의 시’, ‘바람의 시’, ‘물의 시’, ‘황혼의 시’, 그리고 다시 ‘땅의 시’로 회귀하는 이 게임 속 절기의 흐름은 아이에게 매우 중요하다. 계절에 따라 구할 수 있는 약초가 모두 다르기 때문에 마법사가 되기 위해서는 이 모든 계절을 다 겪으면서 다양한 약초를 구하러 위험을 무릅쓰고 모험을 떠나야하고, ‘마법전서’라는 매뉴얼에 따라 약초를 배합하는 것을 스스로 공부해야만 한다. 실패와 좌절을 겪으면서 성장하는 아이는 마법사가 되기 위해 늘 탐구하고 연구한다.
이 모든 것이 이 세계에 접속한 아이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것이 되고 어느 순간에는 현실의 일과를 대체할 수 있을 만큼 중요한 것이 된다. 허구의 세계에서 경험한 것이 실재적 감각으로 치환된다. 아이는 이 세계에서 이곳의 언어를 익히면서 동시에 생활 방식을 터득하며, 자연스럽게 ‘성장’한다. 하지만 모든 아이가 그렇듯이 성장한 아이는 과거의 세계를 잊어버린다. 이곳의 언어, 장소, 경험, 관계를 비롯하여 세계를 잊어버린 아이는 그제야 현실 세계로 돌아온다. 그렇게 중요했던 것들이 가치를 잃어감에 따라, 마법사가 되는 방법은 잊혀지는 것이다.
김허앵은 주로 아이와 여성, 그리고 인간 주변에서 함께 살아가는 동물과 도시에 근접한 자연 환경을 소재로 그림을 그린다. 육아, 돌봄과 가사, 여성의 역할에 대한 이야기를 그림으로 옮기면서 김허앵은 자신의 일상 속 이야기를 그림 안에 늘어놓는다. 육아와 가사, 여성의 역할은 한 개인의 삶만은 아니기에 사회적, 정치적 담론을 이끌어내기에 충분하지만 김허앵의 그림 속에는 이에 대해 어떤 무거운 담론을 형성하기 위해 마련된 주장도, 서로를 헐뜯기 위해 준비된 질문도 없다. 오히려 자신이 맞닥뜨린 한 여성의 출산과 육아, 매일 같은 가사 노동으로 인해 달라지는 자신의 모습과 거기에서 발생하는 지침과 피로를 블랙 코미디처럼 자조 섞인 웃음으로 드러낸다.
반면에 김허앵의 그림 속 아이들은 모두 당당하다. 늘 지치고 울상을 짓고 있는 것은 어른의 몫, 아이는 항상 오히려 더 똑바로 세상을 응시한다. 흐트러짐 없는 눈빛으로 당당하게, 마치 자신의 목표를 정확하게 알고 있는 플레이어처럼 보인다. 《Furry Ways》에서 김허앵은 이전과는 조금 달리, 전혀 다른 세계에 대한 상상을 풀어낸다. “Furry Ways”는 이 오래된 게임에 대한 기억을 통해 작가가 다시 찾은 세계이자 갈 수 없는 세계를 대변한다. 여기 등장하는 아이들은 모두 게임 속 플레이어와 겹쳐진다. 오랜 친구였던 반려견의 죽음으로 상상된 죽음의 세계는 작가가 어린 시절 즐겨 산책하던 그곳을 닮아있다. 우리가 으레 상상하는 강아지들의 세계, 무지개 다리를 건너 죽음 이후의 세계는 어떤 곳일지 상상한다. 그리고 이 새로운 세계를 탐험하는 인간의 모습을 아이에게서, 플레이어에게서 되찾는다.
<너머의 지도>(2022)는 이렇게 죽음이라는 갈림길에서 서로가 속한 세계가 분명히 달라지는 분기점을 가리키고 있다. ‘갈 수 없는 곳으로 접속할 수 있다면’이라는 가정에서 출발했지만 도착한 곳은 어디에도 없다. 죽음이 결국 다시 땅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의미한다면, 플레이어는 이 세계의 모든 계절을 다 겪은 것일까. 이제 얼마큼의 수련이 더 남은 것일까. 하지만 목표까지 얼마만큼의 레벨이 남았는지 확인할 수 없는 현실 세계에는 미션도, 퀘스트도, 아이템도, 이벤트도 없다. 반려동물의 죽음과 그 상실로부터 작가는 다시 상상한다. 가장 근접해 있었던 저 너머의 세계, 손가락 끝에서 클릭 한 번만으로도 갈 수 있었던 세계, 모니터 너머로 또 다른 시간이 흐르던 세계를 다시 생각한다. 그러나 여기 지도는 있는데 갈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인간의 기억은 과거를 되짚으며 재정립되는 것을 멈추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느끼는 시간성은 분명 순환적이지만, 실재의 시간은 여전히 선형적이다. 죽음으로부터 비롯된 상실은 아마도 계속 상기되어 기억 속에서 순환하겠지만 야속하게도 시간은 이내 직선으로 다시 흐른다. 김허앵이 다시 찾은 세계는 아이에게 가장 가까웠지만 결국 아무데도 없는 곳이다. 그렇지만 아이는 그곳을 탐험하면서 성장할 것이다.
다시 볼 수 없는 너에게, XOXO.
글. 이슬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