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tos Indigenous 

2022.10.15. - 2022.11.06.


Artist. Yohan Hàn

가득 찬 플로우를 위한 플로어


동물의 외피를 가공해서 만드는 북은 크기와 가죽의 종류나 상태에 따라 소리를 달리한다. 가볍고 청명한 소리부터 깊고 웅장한 소리까지, 북마다 모두 다른 정도의 울림을 가지고 있다. ‘동물의 외피(animal skin)’이라는 다소 시대착오적인 느낌마저 드는 재료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있어야할 당위성을 스스로 증명하는 듯하다. 원시사회가 그랬듯이, 낭비되는 것 없이 사용되고 그 과정에서 인류는 배우고 습득하여 발전하기를 거듭한다.

작가가 직접 무두질을 배워서 만든 요한한의 작업은 실제 북처럼 때리고 두드려서 소리를 낸다. 그리하여 여타 다른 예술작품과는 달리 자연스럽게 그것의 용도나 쓰임을 생각하게 되는데, 예술에 있어서 그 용도의 문제는 차치하더라도 요한한의 작업의 쓰임새란 무엇일까.

그의 작업은 언뜻 오래된 문명의 토템 같기도 하고 역사 속으로 사라진 인류의 기록 같기도 하다. 요한한의 기존 작업들은 북소리처럼 공명하여 관객과 퍼포머 사이의 관계를 조율하거나, 소리처럼 분명 존재하지만 물질적으로 만져지지 않는 것들의 흔적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타악기로 알려진 북을 비롯하여 그의 작업에는 미묘하게 공통되는 지점들을 발견할 수 있는데, 다소 원시적이고 물활론적인 작업의 전반적인 분위기가 그렇다. 그러나 퍼포먼스를 주관하는 프로듀서이기도 한 그가 제시하는 퍼포먼스는 때때로 SNS를 적극 활용하기도 한다. 가장 오래된 로우 테크놀로지의 일종인 무두질에서부터 인간과 인간 사이를 부재하는 동시에 초-연결하는 하이 테크놀로지의 산물인 SNS까지, 그 격차는 요한한의 작업의 위치를 어느 하나에 한정할 수 없게 만든다. 그리고 이내 그 격차는 직접 퍼포먼스에 참여하고 전시장에 놓인 악기들을 만지고 두드리며 소리를 내는 관객들의 행위로 하여금 해소된다.

2021년 프로토타입으로 제작한 ⟨토착민⟩(2021)부터 ⟨토착민Ⅱ⟩(2022)는 모두 서아프리카나 남아메리카 지역의 전통 악기인 쉐케레(Shekere)에서 모티프를 얻었다. 각 지역마다 악사체(Axatse), 자바라(Djabara), 사사(Saa saa) 등 명칭은 모두 다르지만 이는 주로 여성들이 연주하는 악기로서 사람들이 노동을 하면서 일의 능률을 높이기 위해 리듬을 더하는데 사용되었다고 한다. 거기에 작가는 인간의 형상을 닮은 모습과 복숭아 씨앗, 그리고 ‘토착민’이라는 어떤 부류의 인간을 지칭하는 단어를 제목으로 사용함으로써 이것이 가지고 있는 상징적인 의미를 더욱 가중시켰다.

복사꽃이 한가득 핀 곳을 뜻하는 무릉도원부터, 양기가 가득하다고 하여 귀신을 쫓는 축귀나 퇴마, 또는 불로장생이나 여성을 뜻하기까지 동서양을 막론하고 복숭아가 지닌 속설과 씨앗이 상징하는 잉태와 생명은 세상 만유의 모든 것이 생성되고 운동하는 태곳적 몸을 상기한다. 작가는 이를 통해 ‘태곳적 사고(Archaic thinking)'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태곳적 사고란 어린아이나 원시인들의 특징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것을 단순히 문명화에 반대되는 개념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극도로 첨예하게 발달한 문명사회에서조차 발현되는 태곳적 사고는 오히려 어떤 근원성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요한한의 작업에서 나타나는 원시적인 것, 물활론적인 것, 범신론적인 것의 양상에는 주위를 가득 채우는 에너지가 있다. 그가 말하는 태곳적 사고란 전혀 다른 지역이나 장소에서 발현되었던 문명의 어떤 공통적인 요소를 가리키는 듯하다. 이 공통적인 요소를 근원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어떤 근원적 물질을 가리키는 아르케(arche)가 아닌 인간과 자연이 맺는 무형의 관계에 더 가깝다.

이 무형의 관계는 악기를 흔들며 춤을 춘 흔적처럼 바닥에 남겨진 신발 자국과 같이 있으나 없는 것과 다름없다. 발자국을 따라 지나간 움직임을 상상하면 어느새 그곳에 있었던 자를 추적하게 되는데, 그런 의미에서 토착(Indigenous)은 거기 있었으나 지금은 사라진 것이지 않을까. 어느 지역이나 장소, 넓게는 생물체가 원래부터 가지고 있었던 것을 뜻하면서 동시에 그 땅의 고유한 것, 혹은 본래의 것을 뜻하는 토착이란 단어와 거기에 원형(原型, proto-)이 덧붙여져, 작가가 찾고 있는 ‘protos indigenous’는 어쩌면 이미 사라진, 바닥에 남겨진 이 흔적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인간 사고의 단계를 3가지로 구분하였을 때, 가장 마지막 단계인 세 번째에 해당하는 포이에시스(poiēsis)는 만들기나 제작, 생산을 가리켜 일종의 예술 활동을 지칭함으로서 인식(theoria)이나 실천(praxis)보다 조금 더 나아간 것이었다. 만들기는 인간이 세상에 반응하는 가장 기본적인 능력이다. 사유에 따라 물질의 형태를 만들고, 그 목적이 향유에 있다면, 혹은 기원, 리듬, 연결, 관계, 이 모든 무형의 가치를 끄집어내는 데 그 목적이 있다면 요한한의 작업은 그 자체로 악기이자 이는 곧 전통적인 개념의 포이에시스에 가장 적합한 것처럼 보인다. 그리하여 이곳은 가득 차 있다. 소리와 움직임, 태초부터 있었던 것들과 온갖 비어 있는 것들로 가득 차 있다.

 

 

글. 이슬비

 

 

* 이 글의 제목은 요한한의 작업 ⟨가득 빈 플로우를 위한 플로어⟩(2022)에서 차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