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격담

Sightings

2023.08.23. - 2023.09.17.


Artist. HwaHyun Kim 

Roses In The Hospital 


Roses in the hospital

This century achieved so much 

Roses in the hospital

To Make a voice, no voice at all 


병실 안에 장미들은 

이 세기에 너무 많은 걸 이뤘어 

병실 안에 장미들은 

목소리를 들었고, 모두 침묵했어 1)


뽀얗고 미끈한 피부, 12등신에 또렷한 이목구비, 감정을 알 수 없는 몽롱한 표정, 혹은 강렬한 눈빛. 모두 김화현의 작업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묘사하는 말이다. 그가 그리는 남성들은 모두 적당히 헐벗고 있고 긴 팔다리에 하얀 피부, 과하지 않을 정도의 근육을 가지고 있으며 어딘지 모르게 퇴폐적인 분위기를 풍긴다. 역동적인 자세나 해부학적 인체 표현에서 다룰법한 근육이나 동세는 없고, 평평한 도상처럼 매끈하고 조신하게, 단아하게 있다. 소위 말해 여러 사회적 편견들이 만들어낸 어떤 전형적인 ‘여성스러움’을 나타내는 제스처와 연출로 ‘남성이지만 여성스러운 인물’이라는 표현이 더 적합할까? 적절한 단어를 고르는데 어려움이 적지 않은 이유는 그만큼 남성성과 여성성이라는 것의 구분과 정의가 모호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모호함을 일단 제쳐두더라도 김화현의 그림에서 이 거세된 ‘남성성’의 자리를 대신하는 것은 무엇일지에 주목해본다.


그의 그림 속 인물들은 보는 이의 시선을 적극적으로 응시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때에도 그들은 언제나 타인의 시선에 자신이 어떻게 보이는지, 어떻게 소비되고 있는지를 충분히 인지하고 있는 듯한 모습이다. 잘 준비된 연예기획사의 아이돌처럼, 스스로를 대상화하는데 일찌감치 성공한 그들에게 시선은 두려움이 아니다. 


이러한 작업을 통해 작가가 꾸준히 발언하고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여성주의 동양화’라는 단어로 함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동양화의 긴 역사 속에서 여성의 위치를 되찾겠다는 의지, 혹은 그것을 전복시키겠다는 작가의 원대한 계획에 앞서 그가 차용한 것은 동인지나 팬픽 2), 또는 팬 아트와 같이 여성 중심의 2차 창작물의 형태이다. 이들은 ‘여성 창작자’라는 공통된 특성을 가지고 있는 바, 관음과 노출의 미묘한 관계를  형성한다. 그러므로 여기서 시선의 주체는 여성이며 그것을 충분히 알고 즐기는 대상은 남성으로 자리 잡을 수 있다.


동인지는 주로 문학에서 자주 쓰이는 창작의 형태로 공통의 생각을 가진 필자가 모여 발행하는 잡지나 간행물을 뜻하지만, 하위문화로 넘어오면서 본래 가지고 있던 의미보다 여성들이 주체가 되어 원작을 패러디하는 것이 일반적인 인식으로 남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원작의 주인공들을 BL이나 야오이(やおい)로 표현하는 경우가 있어 주로 성인물로 분류되는 때도 있지만 전체 연령 대상의 동인지도 적지 않다.

김화현은 순정만화에 나오는 연출이나 표현 방식을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또 적극적으로 차용하기 때문에 그의 작업 역시 동인지를 만들어내는 방식과 유사하지만 원작이 아예 부재하거나 중요하지 않는 것에서 조금 다르다. 〈군선도(群仙圖, The  March  of  the  Immortals)〉(2017)나 〈La Grande〉(2014)와 같이 동서양 미술사에 나오는 동명의 원작이 분명히 존재하는 경우도 있으나 〈소상발경(少像勃經, the Devil May Care)〉(2020) 3) 처럼 원작을 비틀어 재전유하는 방식에서 차이가 있다. 그러한 작업 방식으로 인해 그의 작업에서 오히려 여성의 욕망이라든가 관음증과 같은 변태적 성향의 성적 취향 또는 욕구로 일괄할 수 없는 어떤 층위가 덧씌워진다. ‘여성주의 동양화’라는 남성중심의 미술사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려는 김화현의 작업은 이번 전시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이번 전시의 주제이자 전시명이기도 한 ‘목격담’이 그것을 반증한다. 여성들의 남성 뮤즈를 형상화한 것이 목격담이라는 형체가 불분명하고 소문 같은 형태의 떠도는 이야기라는 것으로부터, 실체는 사라지고 정보의 근거는 불확실하게 남는다. 이에 대해 김화현은 영국의 밴드 매닉스(Manic  Street  Preachers)의 기타리스트였던  리치  에드워드(Richard  James Edwards)의 실종 사건에서 출발한다. 일찍이 알코올 중독과 신경쇠약을 보였던 리치 에드워드는 1995년 돌연 모습을 감추었다. 이후 팬들에 의해 몇몇 목격담이 들려왔지만 그것의 사실 여부는 여전히 알 수 없는 채로 남아있다.


김화현은 사라진 리치 에드워드의 생존 흔적을 찾는 팬들처럼, “없는 듯 보이지만 있음이 확실한 것들의 증거를 모아 둔 자리” 4) 로서 이번 전시에서 두 가지 있음의 증거를 채취한다. 하나는 앞서 말했던 여성 창작자들의 남성 뮤즈이고, 다른 하나는 다른 여성 작가들의 영향과 그들의 흔적이다. 그리하여 김화현은 이번 전시를 위한 자신의 뮤즈로 리치 에드워드를 꼽은 듯 하고, 다른 여성 창작자들이 작업하는 방법을 참조하고 그들의 도움으로 연대를 강조한다. 그리고 이것은  전시장 벽면을 흰 종이로 삼아, 과거 출판만화에서 나올 법한 화면 구성으로 순정만화의 연출법을 따른다. 남근이성중심주의(Phallogocentrism)에서 거세된 팔루스의 흔적을 채우는 것은 ‘여성스러움’이 아니다. 그것은 여성중심의 새롭고 완전한 다른 무언가를 주장하는 것도 아니며, 그래서도 안 된다. 어느 것이 더 우월하다는 어리석은 주장은 이분법적 사고와 그것으로부터 비롯된 혐오를 더욱 강화할 뿐, 무엇하나 새로울 것이 없는 역사의 반복이 될 뿐이다. 김화현이 작업을 통해 되찾으려는 것은 남성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아름다운 육체에 대한 심미적 탐구에서의 대상과 주체의 전환, 그로부터 여성 주체가 아름다움과 성을 자유롭게 발화하는 것, 그리고 그것을 차용하고 전유함으로써 이미 있었던 것들을 되찾는 작업이다.


리치 에드워드의 흔적처럼,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목격담처럼, 분명 있었는데 모습을 감추고 행방이 묘연해진 이들을 대상으로 한 창작의 형태이다. 그는 역사 속의 여성 창작자, 그리고 그들의 남성 뮤즈 모두를 기린다.


글. 이슬비



1) 1993년에 발매된 매닉스(Manic Street Preachers)의 2집 앨범 “Gold Against the Soul”에 수록된 곡인 “Roses In The Hospital”의 가사 일부 발췌 


2) 팬 픽션(Fan  Fiction)의 줄임말로  팬들이  좋아하는  연예인, 주로  아이돌  멤버들을  대상으로  허구의 이야기를  묶어  만들어낸  소설. 국내에서는  1990년대  H.O.T.  팬들에  의해  많이  생산(?)되었다. 문답형, 빙의형 등 다양한 형태의 창작 방식이 있고 수위 높은 성적 묘사도 서슴지 않았다. 당시 팬픽은 주요 생산자도 여성, 소비자도 여성이었고 그 팬픽의 팬들도 거의 모두 여성으로, 대상만 남성이었을 뿐 확실히 여성 중심의 하위문화 중 하나였다.


3) 김화현의 〈소상발경(少像勃經, the Devil May Care)〉(2020)의 제목은 중국 후난성의 경치를 여덟 폭의 산수화로 담은 〈소상팔경도(瀟湘八景圖)〉에서 따왔다. <소상팔경도>는 중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경관을 그린 작품으로 취급되어, 국내에서는  고려시대부터 그려졌다고 알려졌다. 중국의 실재 명소를 그린 그림이지만  국내로  들어오며 마치 관념 산수화로 대체된 것으로부터 김화현은  ‘가장  아름다운 것’의 요소를 순정만화의 표현 방식을 통해 남성 신체로 대신하였다.


4) 2023년 작가 노트 중


Photo Courtesy of the art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