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 이를 바꿔 말하면, 거니림은 인간 사회 안에서 관습화된 무관심에 가려진 것들을 다시 끄집어내는 것에 관심을 두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잡초, 비둘기, 돌멩이, 가로수, 모두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를 구성하고 있지만 도외시되는 것들이다. 아무도 그것들의 이름을 모른다.
거니림은 무관심에서 비롯된 소외와 외면이 결국 혐오로 연결되는 지점에 집중한다. 무관심에는 이유가 없지만 혐오에는 이유가 있기-혹은 반드시 있어야 하기-때문에, 그것은 하나부터 열까지 ‘사라져야 하는’ 이유가 된다. <감정만 남은 혐오>(2022)나 <본질을 잃고 점점 강해지는 미움>(2022) 등 제목에서 시사하는 바와 같이 모두 혐오로 귀결되는 감정의 흐름을 보여준다. 이유의 논리적 타당성이 사라진 혐오는 대상 자체에 대한 미움의 감정이 이유가 된다. 매일 아침 출근길, 도시와 도시 간의 이동 속에서도 이 나무들은 항상 그 자리에 있었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가로수가 되었고, 민원에 시달리며 결국 혐오의 대상이 되었다. 무자비한 가지치기, 토막 난 나무 밑동, 버즘나무는 그렇게 조금씩 죽어간다. 버즘나무는 특성상 죽어가는 것이 눈에 띠지 않는다. 속부터 곪아서 결국 죽어가는 버즘나무는 겉으로 보기에는 여느 때와 다를 것이 없다. 버즘나무는 왜 거기에 있게 되었을까? 인간에 의해 그 쓰임과 죽음이 정해진 것들. 버즘나무의 수령은 인간에 의해 좌우된다.
거니림이 도시에서 외면 받는 것들에 주목하는 것은 이것들에 대한 감정이입일까, 이를 통해 다른 것을 보기 위한 수단일까. 어느 하나로 단정하긴 어렵다. 그렇지만 나무의 의지를 상상하는 것, 어쩌면 작가가 외면된 것들에 관심을 두는 첫 번째 이유가 아닐지 추측해본다. 그리하여 나무의 삶을 상상하는 것.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쓰임을 강요당하고 그것에 부응하지 못하면 버려지는 것들의 삶을 되새기는 것. 미움의 감정을 내려놓고 <껍질>(2023) 사이의 생과 사를 들여다보자. 버즘나무의 수령은 그로부터 좌우된다.
글. 이슬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