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학관 美學館 MIHAKGWAN Philosopher's Stone

Offset

2024.9.4.-9.15.


참여작가|야마모토 하나 Hana Yamamoto

기획 및 글|콘노 유키 Yuki Konno

리뷰|야마카와 리쿠 Rick Yamakawa

리뷰번역|콘노 유키 Yuki Konno

도움|유정민 Yoo Jungmin, 주슬아 Sla Joo
디자인|문정주 Jungju Moon

사진|작가 제공


*온기가 휑하니 비어-있다. 

가만히, 그러나 움직임과 함께


  우리가 서 있던 육지가 점점 멀어져 간다. 모터 소리와 함께, 마음은 들뜨기 시작한다. 바다냄새, 풍경, 스크류가 발생시키는 소음, 물결의 너울거림, 환호, 풍경, 물보라, 셔터 소리, 대기의 온도는 이내 사라지는 것을 그들 스스로 잘 알고 있다—정말로? 말은 늘 그렇다.   어쩌면 모르고 있을 수도, 모르는 게 나을 수도 있다.  없어질 리가 없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던 것들이 없어질 때, 차라리 말이라도 꺼낼 걸… 그런 생각을 하던 사이에, 배는 육지로 다시 돌아간다. 도대체 무엇을 간직했다고?   대화는 잘 들리지도 않았다. 풍경은 금방 지루해졌다. ‘물보라로 돌아간다(水泡に帰す)’라는 일본어 관용어처럼 얻는 게 없는 것일까?  남는 것이 없었다고 해서 아무것도 없었던 것은 아닐 것이다—만나거나 닿은 것들의 온기가 맴돈다. 


끝을 알고, 또 모르는 것들이 여기에 있다. (여전히1.) 잘 보이지 않는, 하지만 (여전히2.) 있는 흐름이 담긴 곳. 테이블 위에서 깨진 컵과 컵을 손에 든 모습이 교차되어 손짓한다. 안으로 들어와, 본래 여기서 살지 않은 식물을 애써 키우는 모습을 보면서, 상실을 두려워해서 잠시 묶어 놓은 장식품 옆에서, 유리 너머 보는 풍경들이 빛 속으로 쇄도하고, 잘 들리지도 않는 수다를 가만히 듣는다. 《Offset》은 사진 매체를 기반으로 작업하는 일본 작가 야마모토 하나(Hana YAMAMOTO)의 개인전이다. 그간 일시적인 행위나 흔적으로 간신히 남아 있는 존재에 관심을 보낸 작가가 ‘상쇄(offset)’라는 단어로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있지만 곧 사라질지도 모르는, 혹은 이미 사라질 것을 아는 것들이다. 


전시 제목과 동명의 영상 작업 〈Offset〉(2024)은 크루즈 선에서 수다를 떠는 승객을 찍은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이야기하는 소리는 그들조차도 잘 알아듣지 못한다. (하지만, 여기서,) 대화 소리가 물결 치는 굉음의 속에서 고요히 고동한다—퇴색하지 않은 채. 같은 공간에는 반짝이는 액세서리를 찍은 사진 작업이 걸려 있다. 〈Then you would never lose〉(2024)은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일시적으로 형성된 유대의 모습이다. 장식품으로 쓰기 전 또는 후의, 공개하지 않은 보관 상태로 노출된다. 연결은 때때로 정치적 위계 안에서 만들어진다—사진 작업 〈Pioneer〉(2021)에서 열대식물원의 나무들이 옮겨 심어진 곳에서 배관을 통해 숨을 쉰다. 육지에서 발생하는 이동, 바다에서 발생하는 이동에서 옆에서 옆으로, 흘러가는 혹은 미끄러지면서 전시장 내외에서/로 에너지가 맴돈다.


보여지는 것과 보여지지 않는 것 사이에서, 에너지가 가만히, 돌아간다. 상쇄는 소멸이나 부재로 귀결되기 직전의, 남는 것과 남지 않는 것 사이에 자리하는 이야기이다. 대화는 잘 들리지 않았다. 그렇다고 이들의 경험과 감각한 기억은 다른 형태로 남지 않을까? 작품 안에 남는 것은 피상과 내부에 맴도는(,) 무언가이다. 〈Macht〉(2024)에서 반쯤 채워진 컵에 담긴 것은 더는 없는 희망과 더 있을 수 있는 희망 중의 한쪽이 아니다. 절반의 진실은 남는 것과 애써 남기고 싶은 것, 남아 버리는 것과 남길 수 없는 것 사이를 꿰어 가는 고요함이다. 고요함을 치는 물결 속에 사라지는 것이 있고, 육지에 심어 놓은 이국정취는 배관을 통해 생기를 부여받는다. 둘이 하나여야 하는 장식품은 잃어버리기를 두려워해서 얽힌 듯 연대한다. 


  전시장을 떠나 바깥에서 내가 있던, 지금은 내가 없는 곳을 본다.   온기가 휑하니 비어-있다. 볼게 (아무것도) 없었다기에는 있는,  그러나 확실히 남는다기에는 감각적인 무언가로. 이제는 〈Hikari〉(2022)의 점멸하는 빛도 멀리 보인다. 애초부터 가까이에 있던 것은 아니지만.   시선 너머,  그 끝에, 작품을, 전시장을, 그리고 내면을 맴도는 것이 있(었)다. 


*지은이 권 사에 / 옮긴이 콘노 유키 『“조난당하신 겁니까?—그러세요?”(불신지옥 편)』중 「저 사람이 타고/올라가 있다」에서 일부 인용 및 보충



흘러가지 않게, 흘러가지 않게


첫 번째 컷. 선원처럼 보이는, 흰색 셔츠를 입은 남성의 뒷모습. 두 번째 컷. 선상에서 찍은 걸까. 바다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흘러간다. 세 번째 컷. 암전, 이 어두운 곳에서 나타나듯이 어두운 객실이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흘러온다. 창밖의 바다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그 상태로 어두운 객실이 눈앞에서 지나가고, 화면은 순간적으로 바다로 채워진다. 곧이어 바다가 오른쪽에서 또다시 나타나, 같은 방향으로 파도를 일으킨다. 이어서, 같은 방향으로 파도가 일며 풍경은 흘러간다. 그러고 나서, 다음 컷에서 배의 방향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뒤바뀌고, 풍경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흘러간다. 16:9 화면에 딱 맞는 순간은 일시적이며, 영상의 프레임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계속 흘러간다. 영상을 촬영한 배의 진행 방향과 거꾸로 흘러가는 풍경은 어느 순간 방향이 바뀌어 있는데, 그사이에도 눈은 자연스럽게 흐름을 따라 시선을 보낸다. 선상에 있을 때도 있고, 건너편에 있을 때도 있다. 두 흐름 사이에서 홀로 남아 있게 된 것과도 같았다. 전시 제목과 동명의 영상 작업 <Offset>에서 영상 프레임은 빔 프로젝터 빛으로 나타난 화면 속에서 계속 흐르고 있었다.


전시장인 미학관은 서울특별시 서대문구의 중심, 홍제천과 아주 가까운 교차로 모퉁이에 있다. 교차로는 모퉁이를 자른 듯한 형태이며, 미학관도 사다리꼴 모양의 평면 형상이다. 이 길에서 우리가 보는 것은 [모퉁이를, 위에서 봤을 때] 비스듬히 자른 건물의 절단면이며, 큰 유리 너머에 실내가 보인다. <Offset>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흘러간다. 흐름을 따라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눈은 화면 끝에서 왼쪽으로 튀어나올 때마다, 다시 화면의 오른쪽 가장자리로 돌아온다. 내 눈은 전시장 문을 열기 몇 초 전부터 유리 너머에 시선이 빼앗겨, 흘러가는[=상영 중인( 流れる )] 영상 앞에 있으려고 한다.1) 마음에 몸이 따라오도록 하기. 신체가 그곳에 들어갈 수 있도록 유리 가까이 다가간다.2) 유리면은 비스듬히 잘린 형태이지만, 실내는 직교한 두 벽으로 구성된다. 빔 프로젝터로 보여주는 영상과 오른쪽 벽면에 사진이 네 점 걸리고, 입구 쪽에 있는 방명록 옆에도 작은 사진3)이 놓여 있다. 영상 왼쪽에는 긴 유리창이 있는데 거기서 들어오는 햇빛을 쐬는 것처럼, 누군가의 뒷모습을 찍은 사진이 붙어 있다. 이 사진만 핸드아웃에 적혀 있지 않았다. 사진으로 나온 빛인지, 지금 안으로 들어오는 빛인지, 확실하지 않은 순간이 거기에 있었다. 이렇게 안으로 들어가 몸을 돌려, 유리를 먼저 뛰어넘은 시선을 따라잡듯 걷는 동안에도, 저 바다는 몇 번이나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흘러간다. 흘러, 지나간다.


<Offset>은 6분도 안 되는 영상이다. 따라서 전시장에 들어오기 전도 포함해, 거기에 계속 있다 보면 몇 번이나 반복해서 보게 된다. 작은 전시장에서 몸을 빙글빙글 그만 돌리고, 영상 앞에 놓인 하얀 의자에 앉는다.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흘러가는 속도만 여기에 있다. 교차로인 이곳에서, 내 몇 미터 뒤에서, 유리 너머에서 자동차가 모퉁이를 돌고 지나간다. 파도 소리, 그것보다 큰 배의 엔진 소리, 들렸을지도 모르는 대화를 말하는 흰색 자막(화면 위아래에 등장하는 자막, 그리고 무음의 영상). 내 눈은 투영된 빛 위에서 미끄러지지 않도록, 역방향으로 힘을 계속 주면서, 들리지 않는 것을 들으려고 했다. 그러다 가끔, 전조등 빛이 유리를 통과해 나에게 조금 가려진 채 벽을 쓰다듬어 간다.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흐르는 영상 위에서, 노란빛과 화분의 그림자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미끄러지듯 지나간다. 노란빛이 나를 반대 방향으로 휩쓸어 간다. 파도 사이를 조금 지나갔다가 다시 돌아온다. 영상 어딘가로 내 시선을 보내고 있었는데, 그곳은 저기지, 여기가 아닐 수도 있다. 그러고 보니, 내가 찍은 사진을 다시 보면 “왼쪽에 10센치 더 가서 섰으면 좋았을 텐데” , 이렇게 생각할 때가 있다. 카메라 기능을 잘 활용하지 못하는 데다가 신체와 카메라를 시공간으로 잘 들어오게[=개입]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아무리 빨라봤자, 셔터 속도는 0초가 되지 않는다. 찍는 대상이 움직이지 않는 정물이라고 해도 촬영자는 셔터를 누르는 순간을 결정하고, 거기에 들어와[=개입하고] 있다. 여기에 사진가의 기술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Offset>의 계속 흘러가는 모습은, 감상 행위에도 개입하는[=아슬아슬하게 들어가는( 滑り込む )] 기회를 다시 만들고 있다. 이번에는, 이번에야말로. 눈은 흐름을 따라, 들어갈 수 없는 화면 너머를 상기하게 한다. 손을 뻗으면 닿을 수 있는, 그러나 닿을 수 없는/만지지 않는, 질감이 좋은 프린트도 시야에 그대로 두었다. 사진에 나온 대상에 닿을 수 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그러나 만약에, 셔터를 눌렀을 때처럼, 그 순간에 나도 닿을 수 있다면, 손을 뻗을 수 있었다면...


이 흐름을 몇 번이나 지켜봤을까[=보기만 했을까=보고 보냈을까( 見送る )]. 정신을 차려 보니, 주변이 서서히 어두워지고 있었다. 뒤돌아, 여전히 흘러가는 어딘가의 바다를, 흘러가는 선상을 슬쩍 보고선, 뒤돌아보지 않고 버스 정류장으로 갔다. 홍제천의 수면은 일렁거리고, 내가 걸어가는 방향과 같은 방향으로 흐르고 있었던 것 같다.


글. 야마카와 리쿠


1) 대학교 건축과를 다녔던 시절, 건축 모형의 창문에 유리(모형으로 만들 땐, 얇은 염화 비닐판으로 재현한다)를 끼우지 않았던 필자에게, “유리는 투명한 벽이야”라고 선생님은 말씀하셨다. 시선이 통과한다고 해도, 거기에 물질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유리는 반사되고, 약간 색이 변하며, 무엇보다 공기를 한 번 차단한다. 시각의 투과성 때문에 거기에 물질이 있다는 사실이 순간적으로 강렬하게 인식되는 일이 있다. 그중 하나는, 보이지만 아직 가 있지 못하는 경우이다.

2) 그다음 해, 유리 미닫이문을 맨몸으로 뚫는 사고를 경험했다. 다행히 몸은 크게 다치지 않았지만, (맨눈으로) 유리 너머 보이는 풍경을 향해, 급한 마음을 따라잡듯 속도를 올려 달렸던 기억이 난다. 눈은 항상 앞서 있다[=먼저 달려간다( 先走る )].

3) 《Standing Behind》 (2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