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지의 행위들
Unknown acts
2024.9.23.-10.13.
참여작가|노경택 Kyungtaek Roh
글|유현주
엔지니어링 디자인|아르시오 Arsio
영상 및 사진| 작가 제공
후원|한국문화예술위원회
노경택의 배치의 미학
인간과 비인간-행위자들의 세계-만들기
관계적 행위
모형으로 제작된 몬스테라, 미생물, 벚나무, 사철나무, 인간 그리고 이들의 움직임을 채집하고 반응하여 소리나 시각적 움직임을 만드는 컴퓨터 시스템 장치인 아두이노. 이들은 노경택의 전시에 출현한 각각 서로 다른 종들과 사물이다. 작가는 왜 이들을 한 공간에 배치한 것일까? 나아가 전시장에서 바깥으로 공간을 확장해 실제 살아있는 식물들에게서 일어나는 모종의 ‘관계적 행위’들을 보여주고자 하는 것일까?
보통 식물은 움직이지 않고 제 자리에서 홀로 성장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식물들은 ‘관계적 행위’를 한다. 식물의 관계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햇빛일 것이다. 식물은 햇빛을 이용해 수분과 이산화 탄소를 합성해 당분을 만드는 광합성 작용을 한다. 식물은 뿌리에서 흡수한 영양분과 광합성으로 만든 당분을 결합해 유기산, 글루탐산, 아미노산, 단백질, 핵산 등을 만든다. 이 영양소를 가지고 식물은 잎과 줄기를 키우고, 뿌리를 내리며, 열매를 맺는 행위를 할 수 있다. 한편 식물의 성장에서 또 다른 중요한 요소는 미생물이다. 식물은 노후되거나 불필요한 근모(根毛) 혹은 표피조직을 탈락시켜 토양에 유기물을 제공하는데, 미생물은 이러한 유기물을 식물이 뿌리를 통해 흡수할 수 있는 무기질 양분(질소, 인산, 칼륨, 기타 각종 미네랄) 형태로 만들어 주는 역할을 한다. 흥미로운 것은 식물이 토양 미생물을 위해 스스로 합성해낸 물질의 약 12~40퍼센트를 뿌리를 통해 흙 속으로 분비한다는 사실이다. 즉 미생물과 식물은 서로 공생하는 생명공동체이며 상호의존하는 종들이라고 할 수 있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식물, 미생물, 흙, 물질들이 서로 주고받는 행위들을 목격한다.
다종세계의 행위자 네트워크
노경택은 일찍이 인간과 비인간을 포괄하는 다종세계에 관해 작업해 왔다. 특히 식물을 키우거나 식물의 가구를 제작하는 작업(〈플랜트씨의 가구들〉, 2021/ 2020)을 비롯해 식물, 인간, 기계가 협력하여 하나의 시퀀스(차례나 순서를 따라가는 작업)를 구성하고 관객이 이러한 시퀀스에 반응함으로써 우연한 서사가 발생되는 작업(〈이종협력 시퀀스〉, 2023) 등이 그러한 예이다. 작가는 기계에 대해서도 식물 종처럼 ‘다른 종’으로 간주한다. 예컨대 〈이종협력 시퀀스〉에서 식물과 인간의 대화를 연결하는 매개 장치는 모션센서, 공연용 조명, 스피커와 같은 기계인데, 작가는 기계를 단순히 인간의 목적에 이용되는 수단으로만 보지 않는다. 그는 시퀀스를 구성하는 기계 역시 인간과 식물처럼 대등한 하나의 ‘행위자’로 바라본다. 이처럼 ‘행위자’로 바라보는 시각은 작가가 식물에게 말을 걸고 그들의 신호를 컴퓨터로 감지해서 종이나 풍경과 같은 명상적 소리로 변환하던 〈느린 자람의 노래〉(2019)를 만든 작업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몬스테라, 스킨답서스, 스파티필름의 음성을 사운드로 ‘번역’한 이 작업에서 식물, 인간, 미생물 등 다종의 생명체는 각자 생태적 환경에 맞는 가구에 거주하면서 대화를 나누는 〈녹색의 대화들〉(2021)로 발전한다.
노경택이 말하는 ‘행위자’는 브뤼노 라투르(Bruno Latour)의 행위자 네트워크 이론(Actor Network Theory)에서 말하는 하이브리드 세계에 대한 동의에서 나온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라투르에 따르면, 하이브리드 즉 다종(혼종)의 세계란 인간 행위자와 비인간 행위자들로 이루어진 네트워크의 상호작용에서 파생된 것으로서 우리의 ‘실재’이다. 따라서 자연, 정치, 문화, 사회는 이러한 하이브리드 집합체들의 산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 역시 90퍼센트의 박테리아로 이루어진 생명체인 것처럼, 인간과 비인간이 서로 얽혀있는 다종의 집합체가 거주하는 곳이 지구 즉 ‘가이아’라고 라투르는 말한다. 인간은 인간만이 행위의 중심이라는 사고에서 깨어나야 한다. 이것이 바로 노경택이 식물, 미생물, 기계 모두 ‘행위자’로 대하고 인간 행위자와 소통하는 것에 초점을 두는 이유일 것이다.
배치의 미학과 미지의 퍼포먼스
작가는 이 전시에서 사물들이 동등한 무게감을 뿜어낼 수 있도록 일정한 간격으로 배치한다. 작가가 설정한 방식으로 생명체들로부터 기계는 미세한 신호를 전달하고, 이를 보는 관객의 반응도 또 다른 신호 감지기가 될 터이다. 그런데 이들의 얽힘과 배치에 집중하는 것이 왜 중요한가? 이는 식물, 미생물, 기계, 인간 모두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방식인데, 자본주의의 배치 방식과는 전혀 다르다. 생명의 얽힘에는 관심이 없고 생명을 오직 ‘교환가치’로 자산화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교환되는 자산이 아니라면, 기껏 잡초나 쓰레기에 불과하다. 자연을 낭만적인 공간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그러나 세계의 진보를 위한 기반으로 즉 자연을 자본의 가능성으로 인식하는 세계관에서는, 인류학자 애나 칭(Anna Lowenhaupt Tsing)의 표현을 빌리면, 사람과 사물은 “자신의 삶의 세계에서 떨어져 나오는” 즉 ‘소외’를 겪는다. 이런 맥락에서 노경택의 작업은 이러한 ‘소외’ 구조와 반대되는 방향에서 인간-행위자와 비인간-행위자들이 서로 얽힌 관계망을 노출하는 ‘배치’의 미학을 선택했다고 볼 수 있다.
작가의 배치 구조에서 사람과 사물의 행위자들은 다종의 존재들로부터 전기신호, 가스, 체온, 동작 정보들을 수집해 얽혀지는 또 다른 미지의 행위를 낳는다. 기계에서 나오는 디지털 사운드와 실제 물질이 기계의 움직임과 물리적 마찰을 일으켜 내는 아날로그 사운드, 다종의 행위들이 일으키는 움직임에 의해 LED 조명의 점멸과 색채의 변환 등, 사물들은 흔들고 접고 펴고 돌리고 휘젓고 내뿜으며 진동할 것이다. 이와 같이 다종의 생명체와 기계종이 서로 협력하여 만드는 퍼포먼스는 지속가능한 생태공동체에 대한 은유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소외’ 구조 대신 “인간으로도 자연으로 시작하지 않고, 오히려 자연-속-인류, 유기체와 환경, 생명과 땅, 물 그리고 공기의 다양한 배치를 공동 생산하는 관계의 틀로 시작”하길 권유하는 제이슨 W. 무어(Jason W. Moore)의 세계생태학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과도 만난다. 노경택의 배치의 미학을 통해 인간과 비인간 행위자들의 새로운 세계-만들기를 기대해 본다.
글. 유현주(미술평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