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학관 美學館 MIHAKGWAN Philosopher's Stone

이안류(離岸流)

Rip Current

2025.2.4.-3.1.


참여작가|이지원 Jiwon Lee

글|이슬비 Seulbi Lee

디자인|백호현

사진|스튜디오 만만세 Studio MANMANSE 

역조(逆潮)


적갈색 나무 판넬 위에 드리운 어두운 형체들. 반복되는 아치의 형상. 오래된 성상의 뒷모습과 삐뚤빼뚤한 그림자. 누군가의 묘비에 새겨져 있었던 듯한, 너무 낡아서 읽을 수조차 없게 된 오래된 비석의 문구들. 이지원의 작업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이러한 이미지들은 어딘지 모르게 낡고 오래된, ‘지금’의 시간에서 벗어난 사물들이 주를 이룬다. 불안을 야기하는 이미지들이 으레 그렇듯 시간의 퇴적 속에서 축적된 사물의 낯섦은 그것의 삶과 여정에 대한 상상력을 자극한다. 이지원의 작업도 거기에서부터 출발한다.


그는 자신이 태어나기 훨씬 전부터 있어왔던 사물들을 보며 자신의 존재에 대해 생각하곤 한다고 말한다.1) 이를테면 자신의 존재 이전부터 계속해서 이어진 세상과의 연결점을 낡고 오래된 사물, 죽음을 암시하는 독특한 경험, 그로부터 야기되는 불안에서 찾는지도 모른다. 불안은 인간이 가진 너무나 기본적인 속성임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단 한 번도 이것을 지배한 적이 없다. 마치 어떤 공포 영화의 클리셰처럼, 우리는 곧 이어 나올 다음 장면을 이미 알고 있으면서도 불안과 두려움의 감정을 느낀다. 


이를테면 무언가 튀어나올 것만 같은 캄캄한 밤, 뒤늦게 귀가하는 누군가는 어깨를 움츠리고 누가 자신을 쫓아오지는 않는지 틈만 나면 뒤를 돌아보며 걷는다. 왠지 모를 불길함에 골목을 지날 때면 한껏 긴장한 채로 도둑고양이가 쓰레기통을 뒤지는 소리에도 소스라치게 놀란다. 그는 삐걱거리는 가로등에 의지한 채 검은 밤을 헤쳐 나간다. 그의 발길을 재촉하는 두려움, 어둠 속에서 ‘무언가’ 나타날 것만 같은 이 실체 없는 공포는 그를 불안의 한 가운데로 밀어 넣는다. 불안과 공포는 이성적 판단을 흐리게 만들고, 이윽고 온갖 사물에 감정이입을 수월하게 만든다. 감정이입은 양극성을 갖는데, 다른 사람에 대한 공감과 연민을 일으키는 사회적 수단이면서 동시에 이것이 지나칠 때에는 히스테릭한 결과를 초래하기도 한다. 그리고 때때로 사물과 사건에 대한 감정이입은 상상력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작가는 감정이입을 수단으로, 불안에 형체를 부여하고 시각화함으로써 눈에 보이는 무언가로 바꾸려 한다. 이러한 실존적 고민과 감정이입이 집결 된 그의 작업은 나무 판넬 위에 거칠게 묘사된 중세 시대 어느 고성(古城) 같기도 하고 깊은 지하실에 숨겨진 카타콤 같아 보이기도 한다. 불안을 시각화하려는 작가의 시도는 계속 되지만 그럴수록 그는 실패할 수밖에 없는데, 이유는 단순하다. 시간의 궤적을 되돌리는 것은 작가를 비롯하여 우리 모두에게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불안의 정체를 찾아보려 할수록, 그것은 자신의 손아귀를 빠져나가 계속 멀어질 것이다. 마치 이안류에 갇힌 것처럼, 빠져나가려 발버둥 칠수록 그것에 휩쓸려 들어가 계속해서 가라앉을 뿐이다.


이안류가 발생하는 곳은 수심이 깊어 다른 곳보다 물 색이 짙어 보이는 특징이 있다고 한다. 물과 물이 부딪혀 만들어낸 파도와 그것들이 만들어낸 거품이 바다 밑바닥의 모래와 부딪혀 이안류가 발생하는 부근은 흙탕물이 되는 것이다. ‘죽음의 물살’이라고도 불리는 이안류는 정면으로 헤엄쳐 빠져나오려는 시도가 오히려 역효과를 낸다. 이는 마치 불안에 대한 묘사와 같다. 그가 느끼는 불안의 근원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아마 감히 말하건대 그 불안의 근원은 사실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로테스크한 분위기, 이 음울한 색채는 어쩌면 불안의 표현이면서 동시에 과거에 대한 집착과 애증이 뒤엉켜 자신을 계속 과거에 붙들어 놓으려는 우울감의 표현일지 모른다. 바람의 방향과 반대로 흐르는 조류처럼. 


글. 이슬비

1) 2023 광주시 청년작가 전시 참여작가 이지원 인터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