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길한 징조 속에서 태어나
Born Under a Bad Sign
2026.3.6.-4.5.
참여작가|듀킴, 박웅규, 윤미류, 이민지, 이은실
기획 & 글|이슬비
사진|양승욱
주최주관|미학관
후원|한국문화예술위원회 창작주체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1)
만약 인간 속에 영원한 의식이 없다면, 만약 일체의 것 밑바닥에 있는 것이 광포하게 들끓고 있는 힘이 있을 뿐이고, 이 힘이 위대한 것이거나 하찮은 것이거나를 막론하고, 모호한 격정 속에서 몸부림치며 일체를 생성해 내는 것이라면, 만약 결코 채워질 수 없는 밑창 없는 공허가 일체의 것의 밑바닥에 가로놓여 있다고 한다면, 그렇다면 인생이란 절망 이외의 그 무엇일 것인가?
- 침묵의 요하네스, 「아브라함 찬사」, 『공포와 전율』 27쪽2)
구약성경 다니엘서 5장에는 바빌론의 벨사살 왕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약탈한 성물들로 연회를 벌이는 장면이 나온다. 오만함에 가득 찬 왕은 금과 은 식기에 연이어 술을 따라 마신다. 그러던 중 난데없이 나타난 손가락이 석회 벽에 “메네, 메네, 데겔, 우르바신”이라는 글씨를 새긴다. 벨사살 왕은 그 글귀가 단순한 낙서가 아니라 “재어라, 재어라, 달아라, 나누어라”3)라는 신의 심판이었음을 뒤늦게 깨닫지만, 그날 밤 그는 죽음을 맞이하고 결국 왕국은 멸망한다. 벽에 쓰인 글씨는 불길한 징조, 곧 닥쳐올 불행에 대한 경고이자 예언을 의미한다. 이는 미래가 현재에 보내는 신호이며, 인과적 근거도 개연성도 없이 닥쳐오는 직관적인 감각이다. 신학적으로 징조란 인간의 오만이 극에 달했을 때 찾아오는 절대자의 개입이며, 피할 수 없는 파국(catastrophe)의 전조를 상징한다.
이 불길한 징조는 두려움과 떨림를 야기하며, 인류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반복되어 온 파국의 예언 같은 피할 수 없는 절망의 신호이다. 명확한 기호로 설명되기 이전의 직감이자 분위기이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실존적 감각이다. 이 감각은 아마도 키에르케고어가 『공포와 전율』에서 묘사한 아브라함의 고독과 맞닿아있지 않을까. 보편적 윤리가 중단되고 오직 신과 마주한 ‘단독자’만이 느낄 수 있는 절망과 공포는 인간이 자신의 운명을 완전히 통제할 수 없다는 비극적인 인식을 낳는다. 인륜적, 도덕적 기준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 신의 명령 앞에 선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번제로 올리는 그 순간은 세상 누구에게도 자신의 행동을 설명하거나 이해받을 수 없는, 말할 수 없는 비밀을 간직한 극심한 고립과 고독이었을 것이다. 키에르케고어는 이 절망적인 극단의 상황 속에서 어떤 실존적 도약의 가능성을 찾는다. 이 침묵의 도약은 인간적 한계를 수용하고 스스로의 의지를 내려놓는 비극적 인식과, 그 끝에서 신앙적 결단으로 나아가는 이중적 상태에서 비롯된다. 불가항력 앞에서 인간이 느끼는 무력과 공허, 이러한 비극적 인식을 받아들이면서도 신앙의 도약을 준비하는 긴장감은 좌절의 끝에서 비밀을 쥐어줄 것이다.
전시는 바로 그 ‘말할 수 없는 비밀’이 절망으로부터 비롯되었음을, 그리고 그 불길함이 실존의 예민한 감각으로 치환된 생의 필수불가결한 요소임을 강조한다. 다른 사람에게 말할 수 없는 비밀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예술에 빠져들 것이라는 말에 동의한다. 그 비밀은 대개 아름다운 것만은 아니다. 세상에서 사라지고 싶은 열망, 누군가를 해하고 싶은 충동, 사지를 찢고 짓이겨 형체를 무너뜨리는 상상, 슬픔과 우울, 상실과 고독이 그 중심에 있기 때문이다. 삶의 불가항력과 현실의 부조리를 남들보다 빨리 알아차린 사람이 있다면, 그 절망에서 벗어나려 애써본 경험이 있다면, 문학 혹은 영화에 빠져들 충분한 동력을 갖춘 셈이다. 만약 당신이 그런 사람이라면 전시장 곳곳에 반복되는 장면들과 두 개씩 짝을 이루는 그림들을 기시감의 전조처럼 발견할 것이다. 예기치 못한 우연이 반복 될 때, 우리는 ‘무언가 잘못되고 있다’는 근원적인 불안과 누군가 설계한 듯한 인과관계의 착각을 경험한다. 전시에 참여한 다섯 명의 작가는 각기 다른 매체와 언어를 통해 이 실존적 전율을 실체화한다.
이은실은 인간의 억압된 원초적 본능과 욕망을 응시한다. 초기작이 한옥의 구조를 통해 규범에 투항하는 개인의 갈등을 묘사했다면, 최근에는 주체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정신적 파동을 추상적인 장면으로 번역하여 사회적 금기를 불러온다. 〈자신 없는 숲〉(2019)의 어둡고 축축한 녹색이 캔버스 위에 스산한 공기와 함께 맴돈다. 박웅규는 ‘부정성(negativity)’으로부터 촉발된 모호한 감각을 섬세하게 묘사한다. 벌레나 괴생명체의 형상에 종교화의 양식을 차용하거나, 〈흉〉(2019) 시리즈처럼 발진으로 뒤엉킨 피부 표면을 종교적 승화의 과정으로 표현한다. 그의 작업은 대상에 대한 양가감정을 불러일으키며, 성스러움과 불결함의 경계를 탐구한다. 듀킴은 퀴어성과 종교적 의례의 유사성을 탐구하며 소외된 존재들을 위한 주술적 무대를 창출한다. 〈통곡의 벽: 마이크가 찢은 성소〉(2025)와 같이 그의 작업에서 종종 등장하는 사도-마조히즘의 기묘한 술래잡기는 세속적인 고통을 성스러운 황홀경으로 치환하며 지배와 피지배의 위계를 계속해서 뒤섞는 정치적 각축장이 된다.
윤미류는 찰나에 포착된 인물의 표정과 움직임을 결합하여 추상적인 인상을 드러낸다. 대상의 구체적인 묘사를 넘어 인물과 환경의 상호작용에서 발생하는 독특한 조형성을 추상적으로 치환함으로써, 익숙한 대상으로부터 낯선 인상을 환기한다. 전시장 곳곳에 흩어진 파편화된 대상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균열이 실체를 지운 자리에 남은 잔상을 추측하게 만든다. 이민지는 ‘본 것’과 ‘보지 못한 것’ 사이의 광학적 시차에 집중한다. 그는 주로 사진을 통해 우리 곁에 존재하지만 잡히지 않는 유령적 감각들을 포착하려 한다. 재로 뒤덮인 ‘낙진하는 밤’은 그 자체로 절망적이지만 그의 작업 〈낙진하는 밤〉(2025)은 퍽 아름다운데, 이러한 탐미적 역설은 박제된 이미지의 몽환적인 풍경 속에서 어떤 상실감을 끌어올린다.
전시는 개인이 느끼는 불길한 징조를 사회적 층위로 확장한다. 매슬로우의 자아실현은 인간 욕구의 최상위 단계이나, 도달할 수 없는 신기루이기도 하다. 인공지능이 인간을 대체하는 미래는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이 아니라, 자아실현의 동력을 상실한 채 껍데기만 남은 인간들이 마주할 또 다른 지옥일지도 모른다. 동시대는 자아 찾기를 포기하고 성취가 거세된 미래에 대한 징조와 다름없다. 이 붕괴는 그것이 절망인 줄도 모르는 채 현실화될 것이다. 마치 운명을 점치는 점괘에서 나온 13번째 카드처럼, 절망은 늘 주위에 있었으나 비로소 인식하는 순간 정체를 드러낸다.
전시의 제목은 알버트 킹의 블루스 명곡 <born under a bad sign>의 제목에서 착안하였다. 노래의 후렴구에는 “불운이 없었다면, 나는 운이 전혀 없었을 거야”라는 가사가 반복된다. 노래는 운과 불운의 기묘한 교차를 마치 인생의 반복되는 나날처럼 묘사한다. 탄생과 죽음의 극적인 순간들의 감정을 배제한 채, 조용히 이어지는 보통의 날들에 대해 운명을 탓하지 않는다. 오히려 모든 불운을 포용하는 이 역설적인 고백은 운과 불운이 동전의 양면처럼 한 존재를 구성하는 필연적인 대칭점임을 시사하며,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불확실성에 대응하기 위해 구축해온 신념들을 무능하게 만든다. 타로의 13번째 카드, ‘죽음(Death)’ 카드는 한 시대의 종말과 새로운 시작을 의미한다. 이것은 정체되어 있던 지난한 시간이 끝나고 새로운 기회가 찾아오는 신호로 읽을 수 있다. 성장에 도움이 되지 않는 썩은 잎을 과감히 잘라내는 필연적인 변화, 전시는 조용히 절망하는 세계를 긍정할 것을 독려한다. 절망은 새로운 시작을 예고할 것이다. 두렵고 떨림으로.
글. 이슬비
1) 빌립보서 2장 12절,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2) ‘침묵의 요하네스(Johannes de Silentio)’는 쇠얀 키에르케고어의 필명 중 하나이며, 그는 이 이름으로 『공포와 전율』(Fear and Trembling, 1843)을 썼다. 그러나 한국어 번역본에는 독자의 혼란을 막기 위해 이러한 필명 대신 쇠얀 키에르케고어의 이름으로 출판되었다. 이 책의 제목은 각주 1의 빌립보서 2장 12절 중 ‘두렵고 떨림’이란 부분에서 차용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쇠얀 키에르케고어, 『공포와 전율』, 임춘갑 옮김, 도서출판 치우, 2011)
3) 다니엘서 5장 25-28절. “기록된 글자는 이것이니 곧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이라, 그 글을 해석하건대 메네는 하나님이 이미 왕의 나라의 시대를 세어서 그것을 끝나게 하셨다 함이요, 데겔은 왕을 저울에 달아 보니 부족함이 보였다 함이요, 베레스는 왕의 나라가 나뉘어서 메대와 바사 사람에게 준 바 되었다 함이니이다 하니” (필자 강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