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라지 : 일곱 번째 하늘
Mi’raj : The seventh Heaven
2026.7.3.-7.26.
참여작가|염지희
기획 & 글|이슬비
포스터디자인|파이카
사진|뵈르 스튜디오
주최주관|미학관
후원|한국문화예술위원회 창작주체
서울특별시, 서울문화재단
망각의 땅 위에서는 모두가 최초의 인간이 되었다.1)
어디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을까. 무엇을 먼저 이야기하는 것이 좋을까. 시간인가, 죽음인가, 아니면 시작인가? 혹은 기원일까. 최초의 인간의 탄생에 대해서 먼저 이야기하는 것이 좋을까? 아니면 일곱 번째 하늘에 대해서? 혹은 발렌틴에 대해서?
글의 첫 마디를 어떻게 시작하면 좋을지 고민하며 한참 동안 염지희의 작업을 들여다본다. 왜냐하면 이 글에서, 그의 작업에서, 이번 전시에서, 첫 번째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염지희의 새 시리즈에는 대략 세 개의 층위가 겹쳐져 있다. 최초의 인간, 일곱 번째 하늘, 그리고 발렌틴. 그것들 중 무엇 하나 ‘첫 번째’라고는 할 수 없기 때문에 시작을 고민하며 시간을 보낸다. 왜냐하면 첫 번째는 언제든지 뒤바뀔 수 있기 때문이다. 스프 한 그릇에 장자권을 팔아넘긴 에서2)와 그로 말미암아 죽기 직전 축복을 내리기 위해 장남을 데려오라는 이삭의 말에 아내 리브가가 속임수를 써서 평소 더 아꼈던 차남 야곱을 이삭 앞에 앞세웠던 것처럼 말이다. 그리하여 야곱은 장남인 에서를 대신하여 이삭의 축복을 받지 않았던가. 이처럼 이 글에서 시작, 처음, 기원, 첫 번째는 중요하지 않다. 그러므로 언제든 그것이 쉽게 뒤바뀔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글을 시작하겠다.
최초의 인간에 대해서 먼저 이야기해볼까? 알베르 까뮈(Albert Camus)의 사후 출간된 소설 『최초의 인간』(Le Premier Homme, 1994)은 주인공 자크 코르므리가 죽은 아버지의 묘지를 찾아가는 과정을 담고 있다. 염지희가 이번 작업 시리즈에서 많은 부분 빚지고 있는 까뮈의 이 소설은 그의 유작이자 자전적 소설로 알려져 있다. 까뮈가 불의의 교통사고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등지게 된 순간에도, 그의 가방 속에는 144장의 『최초의 인간』 초고가 담겨 있었다고 전해진다. 이 책은 그가 마지막 순간까지 집필하던 소설이자 그의 죽음으로 인해 결국 완성되지 못하고 끝난 장편 소설로, 1차 세계대전 당시 징집되어 어린 나이에 죽음을 맞이한 자신의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이자 아버지 없이 자란 자신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자크 코르므리 역시 전쟁으로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였기에, 아버지의 얼굴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한다. 묘소에 도착했을 때, 묘비에 적힌 생몰연도를 보면서 지금의 자신보다 어린 나이에 죽은 아버지를 떠올린다. 그는 아버지가 자신에게 남긴 것은 아무것도 없고, 자신 또한 아버지에 대해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실감한다. 유산 없는 삶이란 독립적인 개체로서의 인간의 실존적 운명이지만, 홀로 세상에 내던져진 존재로서는 극단적 고독을 의미한다. 이른바 ‘존재론적 고아’ 상태의 최초의 인간.
그런데 최초의 인간이란 무엇인가? 그는 누구인가? 신이 처음으로 만든 인간일까, 자연발생적으로 등장하게 된 첫 번째 인간일까. ‘최초’의 인간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이 가능하긴 할까? 무엇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은 이미 그 대상 이전에 어떤 존재가 선행하고 있다는 뜻일 테니, 최초가 여전히 알 수 없는 것으로 남는다. 그러므로 최초는 사후적으로 정립될 수밖에 없다. 까뮈에게 ‘최초의 인간’은 앞서 말했든 존재론적 고아 상태를 의미한다. 그것은 선형적 시간의 순서에 따른 처음이 아니라, 아버지의 부재에서 오는 역사적 단절로부터 기원을 잃은 자가 스스로 근원이 되어야 하는 상태, 다시 말해 고독한 실존의 형태를 드러낸다. 까뮈는 최초를 망각 위에 세운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든 최초의 인간이 될 수 있다.
그렇다면 염지희의 작업은 어떤가. 음울하고 어두운 분위기, 뿌리를 알 수 없는 잘린 자작나무와 얼굴이 보이지 않는 사람들. 거꾸로 매달린 사람, 아치형 건물의 구조와 떼를 지어 날아가는 까마귀들. 어둡고 침침한, 불길하고 음산한 이 작업들은 죽음을 이야기하는가, 아니면 뒤섞인 시간을 이야기하는가? 사실 무엇을 먼저 이야기하든 상관없다. 이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새까만 바닥 위에는 무엇을 먼저 두어도 그 순서는 곧 무의미해지기 때문이다.
이는 염지희가 작업을 하는 방식과 닮아 있다. ‘콜라주’라는, 단순히 오리고 붙이며 형태를 만들어가는 이 행위에는 고정된 서열이나 순서가 없다. 다만 먼저 붙이고 나중에 붙인 것들의 미세한 ‘겹침’만 있을 뿐이다. 사실 그마저도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그의 작업에서는 소위 말해 숙련된 작가의 손끝에서 느껴지는 필치의 고유성도, 독특한 색감이나 붓질의 습관도 느껴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다른 질감의, 다른 세대의, 다른 시간대의, 다른 매체의 파편들을 임의로 오려붙인 것들이기 때문이다. 콜라주라는 방식 자체가 생산자의 고유성(originality)을 제거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방식이 염지희라는 작가의 고유성을 대변한다. 연필과 콩테, 목탄으로 가득 채운 화면 위에 전후 사진 아카이브에서 추출한 흑백 사진 조각들이 더해지면서 비로소 하나의 장면으로 완성된 이 작업들은 부서진 사진 조각을 긁어모아 정교하게 구성된 시퀀스를 연출하기에 이른다. 콜라주가, 특히 염지희가 즐겨하는 사진 콜라주가 특성상 여러 시간대를 한 화면에 옮겨 놓을 수 있는 것은 콜라주라는 기법이 지닌 특성이지만, 염지희의 콜라주 회화가 독특한 이유는 그 뿐만은 아니다. 그의 작업에서 겹쳐 보이는 것들을 찾아보자. 시간인가, 죽음인가, 아니면 시작인가? 혹은 기원일까.
염지희는 새까만 바탕 위에 사진만 콜라주 하는 것이 아니다. 문학, 철학, 오래된 시의 일부를 가져와 직접적인 형태로 드러나 보일 수 있도록 문구를 삽입하기도 하고, 작업의 소재를 찾기 위한 수단으로 들춰보는 많은 책들 속에서 영감을 받은 장면이나 문장, 인물을 소환하기도 한다. 제발트(W. G. Sebald)의 소설이나 장-뤽 낭시(Jean-Luc Nancy)의 글, 라이너 쿤체(Reiner Kunze)의 시구, 중세 시대의 종교화 등이 그렇다. 이번 시리즈 역시 까뮈의 최초의 인간을 비롯하여 일곱 번째 하늘, 미라지(Mi'raj) 등이 있다. 그는 소설 속 장면을 시각화하기도 하고, 문맥을 생략한 채 특정 문장 그 자체에 주목하여 그것을 일련의 시리즈로 구성하기도 한다. 이렇게 수집된 텍스트와 모든 서사는 파편화되어 염지희라는 까만 바탕 위에 콜라주되고, 이질적인 조각들이 뒤섞이며 새로운 장면으로 재탄생한다. 콜라주는 여러 시간대를 한 화면에 옮겨 놓을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작업 안에서의 시간성은 비정형일 수밖에 없다. 과거 사진을 스크랩하는 행위 자체가, 이미 죽음을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작업에서 최초의 인간은 익명적 존재로 매번 새롭게 등장한다.
그럼 이제 발렌틴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그가 도끼를 무대를 부숴버린 이후를 상상해보라. 그는 〈트루먼 쇼〉(The Truman Show, 1998)의 주인공 트루먼처럼, 거짓으로 뒤덮인 세계에서 평범한 일상을 보내던 중 무언가 미묘하게 어긋나는 것들을 발견하고, 마침내 그것을 부숴버리기로 결심한다. 이를테면 매번 같은 시간 출근길에서 똑같은 사람들을 마주한다든가 혹은 아내가 말다툼 중에 갑자기 제품을 홍보한다든가, 마치 자신만 모르는 비밀을 모든 사람들이 공유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때처럼 거짓을 확신할 수는 없지만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직감한 트루먼처럼 말이다. 발렌틴은 트루먼과 같이 거짓된 세계에서 벗어난 최초의 인간이다. 혹은 거짓된 세계에서 태어나고 자란 최초의 인간.
그리고 동명의 발렌틴이 있다. 독일의 극작가이자 코미디언인 칼 발렌틴(Karl Valentin)은 브레히트(Bertolt Brecht)의 동료이자 그의 소격효과(Alienation Effect) 이론에 많은 영감을 준 인물로서, 자신의 공연에서 무대의 세트나 집기들을 부수거나 파괴하면서 무대와 객석 사이의 거리두기를 불가능하게 만든 인물이다. 독일의 찰리 채플린이라는 명성에 걸맞게, 카바레 공연부터 무성영화까지 그는 500편이 넘는 시나리오를 남겼다. 연극 무대의 생생함과 배우의 연기를 통해 서사의 몰입감을 강조하여 극의 절정에 다다랐을 때 관객에게 그로 하여금 어떤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하는 것이 고전적 연극의 주요 장치였다면, 소격효과 혹은 소외효과라고 불리는 브레히트의 이론은 관객이 무대에 몰입하는 순간에 그것을 무너뜨리는 행동을 의도적으로 시도하는 것을 의미한다. 발렌틴의 도끼는 무대를 부수고 나와 현실과 연극 무대 사이의 간극을 삭제하는 역할을 한다.
무대를 부수고 나온 발렌틴. 그는 가상과 현실 사이의 거리를 없애버렸지만 그의 가상 세계 역시 현실 위에 지어진 것이었으리라. 여기서 이야기하는 발렌틴이란 인물이 실존했는지에 대해서는 어쩐지 의문이 든다. 이미 ‘칼 발렌틴’이라는 사람으로부터 발렌틴이라는 인물로 전도되었기 때문에, 그가 누구였으며 무엇이 먼저였는지는 넘어가도록 하자. 처음은 중요하지 않으니까 말이다. 그리하여 이 전시는 부서진 무대 위에 다시 세워졌다.
이 전시는 염지희의 지난 개인전 《녹투라마 : 발렌틴의 도끼》(2025, 인천아트플랫폼)와 짝패를 이룬다. 지난 전시의 시퀄(sequel)이자 프리퀄(prequel)인 이 이야기는 이전 전시에서 미처 다 다루지 못했던 녹투라마4)의 배경을 드러낸다. 칠흑 같은 밤하늘인가, 울렁이는 밤바다인가. 녹투라마의 미지의 아름다움과 혼란이 공존하는 풍경이 넓게 펼쳐진다. 일곱 개의 풍경 연작은 은연중에 다음의 두 가지를 지시하고 있다. 하나는 무함마드가 승천하여 계시를 받기 전 거쳤던 밤의 여정이고, 다른 하나는 예루살렘의 성전산에서 하늘로 솟아올라 일곱 명의 선지자들을 만나게 되는 각각의 천계이다. 무함마드는 첫 번째 하늘에서는 아담을, 두 번째 하늘에서는 예수, 이어 그 다음에는 요한, 요셉, 에녹, 아론, 모세를 만난다. 그리고 마침내 일곱 번째 하늘, 풍경은 수평으로 늘어서고 천사는 수직으로 상승한다.
이 선지자들은 모두 죽었다. 이미 죽었고, 무함마드도 죽었다. 신학의 오래된 역사만큼이나 오랜 시간 이전에, 허구와 사실을 구분할 수 없을 만큼 시작이 불분명한 그 어떤 지점으로부터 지금까지 계속 인용되면서 살아온 글들은 염지희의 작업에서 다시 한 번 시각성을 획득한다. 오래된 사진 아카이브에서 추출한 익명성을 바탕으로, 어둡고 칙칙한, 다소 불길한 이미지의 콜라주 안에서 본래의 시간과 의도와 주체를 잊어버리고 염지희라는 바탕 위에 콜라주 된다. 그리하여 그의 작업 안에서 다시 태어난 최초의 인간(들).
글. 이슬비
1) 국내 번역본 원문은 다음과 같다. “그가 오랜 세월의 어둠을 뚫고 걸어가는 그 망각의 땅에서는 저마다가 다 최초의 인간이었다.” (알베르 까뮈, 『최초의 인간』, 김화영 옮김, 열린 책들, 2026. 203쪽)
2) 창세기 25:31
3) 창세기 27:23
4) 야행성 동물원. W.G. 제발트의 소설 『아우스터리츠』(Austerlitz, 2001)에 등장하는 안트베르펜 동물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