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학관 美學館 MIHAKGWAN Philosopher's Stone

스탄차

Stanza 


참여작가|박해선, 손승범, 이은지, 차현욱

기획|이슬비


인천아트플랫폼E1전시장2(인천)

2025.4.1.-4.10.

주최주관|이슬비 

후원|인천광역시, 인천문화재단, 토지문화재단

협력|미학관

사진|이서영


이당미술관(군산)

2026.1.16.-2.22.

주최|이당미술관

주관|미학관, 이당미술관

후원|문화체육관광부, (재)예술경영지원센터, 지역전시활성화

협력|(재)군산문화관광재단   

사진|최철림


들숨과 날숨의 중간, 스탄차1)


  ‘행간’을 뜻하는 ‘스탄차(stanza)'는 줄과 줄 사이의 간격, 문장 앞에 들여쓰기, 단락을 마무리하는 줄 바꿈, 단어와 단어 사이의 띄어쓰기 등을 의미한다. 아감벤(Giorgio Agamben)은 스탄차라는 개념을 통해 에로스와 시적 언어의 연관성, 시(詩) 공간 속에서 발생하는 욕망과 함께 유령 혹은 환영을 찾아내려 시도한다. 아감벤에게는 이 모든 예술의 요람이 되는 스탄차야말로 행과 행 사이의 경계이자, 욕망과 욕망의 대상 사이의 균열이 메워지는 공간이다. 로마 시대 말기 방2) 과 같은 주거 공간의 뜻으로 쓰이던 이 단어는 이후 일련의 시 형식을 일컫는 단어로 쓰다가, 단테에 의해 시의 정수가 모이는 곳이라는 의미를 더하게 되었다. 단테부터 아감벤까지, 이로써 행간은 어떤 은유의 공간이 된 것이다. 이미 ‘시의 거주지’로서 스탄차는 물리적 공간, 눈에 보이는 현실적 공간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주거 공간이라는 뜻에서 의미가 확장되었다면 이는 아마도 비어있는 방 혹은 손님을 맞이하는 방이 될 것이고, 시 문학의 어떤 문법적 규칙으로서 이해되었다면 이는 문맥의 흐름과 이해를 돕기 위한 수단이었을 것이다. 스탄차, 그것은 있음에도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며, 없음에도 인지할 수 있는 무엇이다. 이를테면 이것은 행과 행 사이의 빈 공간, 줄 바꿈으로 인해 아무 글자 없이 띄어쓰기만 존재하는 텅 빈 행이 될 것이다.

  이는 또한 말하기 안에 숨겨져 있는 음절과 음절 사이의 공기의 흐름을 지시하기도 하는데, 예를 들면 숨을 들이마시고 내쉴 때의 그 사이, 아주 잠시 동안의 멈춤과 비움이 발생하는 순간을 지시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행간은 호흡과 같다. 들숨과 날숨의 중간, 산스크리트어로 ‘쿰바카(kumbhaka)‘는 호흡을 몸 안에 담아두는 것을 의미한다. 주로 요가에서 사용되는데, 스탄차를 굳이 어떤 행위와 비교하자면 이와 가장 유사할 것이다. 숨을 들이마시고 호흡을 그대로 몸 안에 보유하는 것, 그리고 숨을 깊게 내쉰 뒤 연이은 호흡을 멈추고 잠시 숨을 거르는 것. 쿰바카는 신체 밖에서는 아무 것도 일어나지 않는 고요함이며 오로지 그 숨을 보유한 자만이 느낄 수 있는 생동감이다. 스탄차는 눈에 보이지 않는 공기를 들이마시고 내쉬는 숨처럼, 마찬가지로 문장과 문장을, 단어와 단어를 연결해주는 멈춤이다. 흐름이라는 일종의 연속성이 있기 위해 필수적으로 동반되는 멈춤. 채우기 위해 비우는 것, 또는 채우고 비우기의 반복. 기억과 망각의 오래된 상관관계에도 이와 같은 변증법적 나아감이 있다. 기억의 연속성을 유지하기 위해 망각이 전제되듯이, 모든 비워짐이 채움에 앞서 존재한다. 스탄차는 연결을 위해 존재하며, 그러기 위해 비어있다.

  이는 점점 더 가속화되는 현대사회의 어떤 흐름 속에서 멈춤의 의미를 되새기는 것과 같다. 현대사회의 시간 감각 속에서 무언가를 멈추고 들여다본다는 것은 그대로 도태되거나 적응하지 못하는 일로 여겨지곤 한다. 이 전시는 행간, 즉 스탄차라는 단어가 지시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의 공통적인 특징으로 ‘비워내기’ 혹은 ‘덜어냄’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시의 거주지로서 스탄차가 띄어쓰기와 같은 보이지 않는 것이라면, 이는 눈에 보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있음’으로 인지하고 작동하는 방식에 대해 이야기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이 전시는 이러한 비가시적인 장소에 각자의 방식으로 무언가를 채워 넣는 작업을 모은다. 이들이 채워 넣는 방식 혹은 무언가를 채워 넣는 행위는 서로의 행간을 해치지 않으면서 동시에 존재하고, 숨결처럼 서로를 보이지 않는 곳에서 지지한다. 

 

  박해선은 “쓸모를 다한 파편, 상실의 찰나, 시작과 완결 사이의 여백, 목적을 담지 않은 속성, 이름이 사라진 현장의 이미지 조각”들을 수집하며 그려왔다. 잠깐 피고 지는 꽃, 곧 녹아 없어질 얼음, 필요한 부분만 도려내 남게 된 종이 조각 등. 사라질 존재에게 캔버스 표면에나마 머물 자리를 마련해준다는 작가는 다시 그들에게 공간을 제공한다. 〈무너지고 세워지는 이름〉(2024) 시리즈는 자투리 나무판에 소실될 것들을 그린 후, 돌이나 그림을 그린 나무판끼리 포개고 쌓아 서로를 딛고 선다.  사라져버릴 미약한 사물들은 그렇게 동일한 힘을 주고받으며 멈춰있는 상태로 현재 속에 머물면서 하나의 맥락을 형성한다.

  손승범은 오랜 기간 동안 기원이나 추앙의 대상이 되는 기념비적인 사물과 눈길도 닿지 않고 이름조차 없는 잡초를 병치한 이미지를 그리거나, 버려지고 방치된 물건들을 수집하여 기념비 형태의 오브제로 치환한다. 그의 작업은 정반대의 것들이 서로의 의미를 퇴색시키는 동시에 서로의 의미를 부각시키며 한 화면에 공존한다. 기억됨과 경건함, 새로운 것이 잊혀짐과 동시에 사소함, 버려지는 것을 전제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손승범의 작업은 대비되는 사물의 동등한 배치를 통해 전시 주제인 스탄차의 작동 방식을 시각화하여 드러낸다.

  다른 한편 이은지는 두루뭉술하지만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것들에 관심을 둔다. 특히 기의와 기표 간의 관계에 주목한다. 기표를 획득하지 못해 서성이며 부유하고, 명확하게 특정 지을 수 없는 형상을 ‘덩어리’로 상정하고, 다양한 덩어리를 만들고 그 덩어리와 연결되는 다양한 주제들을 덩어리에 이름 붙인다. 덩어리는 물리적으로 변하지 않지만, 붙이는 이름에 따라 계속해서 다른 의미를 획득해 간다. 

  차현욱은 경험을 바탕으로 그림을 그린다. 경험을 ‘지금’ 그림으로 나타낸다는 것은 과거가 현재의 시점에서 재구성되거나, 예지된 미래를 과거에 중첩시키는 과정을 지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경험’은 본질적으로 균질적인 집합일 수 없다. 과거, 현재, 미래가 선형적으로 이어지지 않고 경험의 파편 속에 중첩되어 어떤 연속성에 틈을 낸다. 작가는 경험의 파편들을 엮으며 산수화의 형식을 통해 가시화한다.


  이들은 각자의 행간을 유지하며 비움을 대체한다. 이들의 작업을 통해 스탄차의 보이지 않는 형태를, 그 장소를, 위치를 더듬어보자. 성급히 대상을 의미화하여 소유하기보다 그 안에 녹아들 것. 의미의 작동이 멈춘 지점, 단순히 숨을 참는 것이 아니라 숨을 몸 안에 가두어 둠으로써 그 안에서 발생하는 미세한 변화를 발견해 볼 것. 《스탄차(stanza)》는 비가시적인 것을 드러내기 위해 애써 어떤 시각적인 형태를 부여하기보다 이들의 작업 안에서 행간을 찾아내려는 시도에 가깝다. 


글. 이슬비


1) 이 전시의 제목으로 사용된 스탄차는 『행간』(Stanze, 1977)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어 국내에 소개된 조르주 아감벤(Giorgio Agamben)의 책에서 차용하였음을 밝힌다.

2) 라파엘로의 명작 중 하나인 〈아테네 학당〉(The School of Athens, 1509-1510)이 그려져 있는 바티칸 궁의 교황의 집무실 또한 ‘라파엘로의 방(Stanze di Raffaello)’이라고 불린다.  


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본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보이지 않지만 인지할 수 있는 무엇, 상정할 수 있으나 붙잡아둘 수 없는 그 무엇. 우리는 이것에 대해 따로 설명하지 않아도,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구분하여 생각하는 것은 아주 익숙하다. 사고를 가능하게 하는 언어부터 기표와 기의로 나뉘어 있으며 시각 외 다른 감각으로 느낄 수 있는 비가시적인 것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보이지 않는 것을 본다는 것은 다른 차원이다. 이는 대상을 포착하고 소유하려는 시각 중심의 인지 작용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 지점에서 발생한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본다는 것은 부재와 공백의 자리를 발견하기 위해 보는 것을 멈추는 행위이다. 이 행위는 우리를 수수께끼로 몰고 가는 것이기도 한데, 부재와 공백을 마주한다는 것은 불가능성의 공간을 목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전시 《스탄차 Stanza》의 제목은 ‘행간’으로 번역된 조르주 아감벤의 책에서 차용한 단어이다. 스탄차는 시(詩)의 형식을 가리키는 문학용어로 당시 시의 유일한 대상인 사랑의 기쁨joi d’amor을 간직하고 있는 공간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 공간은 철학의 정수가 모이는 공간이기도 하다. 아감벤에 따르면 모든 정통한 철학은 항상 기쁨을 목표로 하고, 정통한 시의 궁극적인 목표는 (사랑하는 대상을) 앎이었기에 시와 철학의 언어는 사실 서로의 목표로 향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시와 철학의 언어는 끊임없이 구분 되는데, 시의 언어는 묘사하는 대상을 파악하지 못하지만 소유하고, 철학의 언어는 대상을 소유하지 못한 상태에서 파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궁극적으로 같은 목표를 가지지만 다른 양상으로 나타나는 두 언어의 분열이 나타내는 것은 우리는 결코 어떤 대상에 대한 온전한 앎(소유)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이 분열이 공존하며 불가능성이 드러나는 공간, “어떤 식으로든 소유하지 말아야 할 것을 소유해야 한다는 불가능한 과제 앞에서 인간의 영혼이 대답을 시도하는 공간”이 바로 스탄차이다.1) 이 분열, 소유하기 위해 다가갈수록 대상은 아득히 멀어지는 이 거리는 언어가 “현존의 원천적 파열”2) 위에 머물고 있기 때문이다. 무한한 갈라짐으로 불가능성이 펼쳐지는 공간인 스탄차. 이 공간은 전시장 안에서 어떻게 감각되고, 어떻게 작동하는 것일까?

 

쓰고 남은 종이 조각, 마른 덤불, 자투리 나무패널. 유약하고 가벼운 사물들이 거대한 캔버스를 채우고, 공간을 이룬다. 쓸모를 다하고 어딘가에서 탈각된 파편들. 박해선은 〈만들 수 없는 모양〉(2022-2025) 시리즈에서 무용한 존재를 조용히 품에 담아 어루만지고 다시 내보인다. 이미 사라진 존재가 화면으로 돌아온다. 전체에서 떨어져나와 의미를 잃었던 파편은 화면에 흔적으로 남아 또다시 본래의 자신과 무한히 멀어지며, 매번 다른 서사를 부여받는다. 〈소멸되지 않는 시〉(2024)는 234점으로 구성된 작은 화면이 모여 하나의 이미지로 완성되는데, 《스탄차》에서는 229점만이 걸려 여백이 담긴 풍경으로 만들어진다. 가까이에서 보는 작은 장면의 연속은 멀리서 하나의 풍경으로 관조하고 싶은 충동을 불러 일으킨다. 거대한 화면을 보기 위해 뒤로 물러서는 순간, 사이사이 빈 공간이 행간을 만들어내며, 여백으로 끊긴 풍경에 상상력이 잠입하여 새로운 이미지가 만들어진다. 벽면을 벗어난 〈무너지고 세워지는 이름〉(2024-2026)은 새로운 공간에서 매번 다른 받침점을 찾아 서로의 무게를 지탱하며 공간에 배치된다. 기존 역할과 내러티브에서 분리되어 나온 파편은 캔버스와 공간에 흔적으로 남아 무한히 열리는 틈이 된다.

 

발길이 잘 닿지 않는 곳에 누군가가 기원하는 마음으로 쌓은 돌탑이 있다. 바닥에 놓인 돌 중에 모양, 무게, 색이 적당한 것을 찾아 중심을 잘 맞춰 하나씩 포갠다. 무너지는 위험을 감수하면서 같은 행위를 반복한다. 수고스러우면서도 주술 행위치고 간단한 이 행위는 일상과 비일상의 경계에 놓여있는데, 돌탑을 쌓으러 해당 장소로 가기보다 우연히 지나가는 길에 쌓인 돌탑을 보고 갑자기 쌓는 경우가 대다수이기 때문이다. 잠깐의 유흥과 작은 염원이 담긴 돌탑은 이내 잊히고, 아슬아슬하게 서서 그 자리를 지킨다. 손승범이 포착하는 사물들은 이런 돌탑과 같다. 일상과 비일상의 경계에 위치하여 소외되고, 지나쳐버리기 쉬운 존재들. 〈서로를 위한 멈춤〉(2023), 〈깊은 마음〉(2025), 〈꿈꾸는 돌 II〉(2025)에서는 만들어지고 이내 잊히는 돌탑을 고요하고 경건하게 드러낸다. 중심에 이르지 못하고 주변에서 서성이는 부차적인 존재를 화면 전면에 내세워, 한때 간절했지만 잊힌 어떤 소망들을 떠오르게 한다. 〈신호를 보내는 기념비 II〉(2022)는 작가가 재개발 지역에서 수집한 오브제와 자연물로 만든 설치작업이다. 타자의 일상에서 버려진 것들로 만든 기념비는 망각된 사물을 기념하고 추앙하는 위치로 끌어 올리며 기억 이전에 망각이 존재하고 있음을 상기시킨다.

 

전시장에 들어갔을 때 처음 시선이 향한 것은 촛대바위였다. 그 누구도 작품명을 촛대바위라고 말하지 않았지만, 본능적으로 촛대바위임을 알 수 있었다. 실제 작품명이 촛대바위는 아니었지만, 이은지의 〈촛대 03〉(2023)는 바로 이러한 상황을 표현한 작업이다. 작가는 산이나 바다에서 볼 수 있는 바위와 같은 자연물이 형태에 따라 이름 붙여져 모두가 공유하는 고유명사가 되는 과정을 추적한다. “이름은 그것을 통해 아무것도 전달되지 않고, 그것 속에서 언어 자체가 스스로를 절대적으로 전달하는 무엇”3)이라고 했을 때, 이 과정은 다시 언어의 불가능성이 펼쳐지는 스탄차라는 공간으로 우리를 이끌 것이다. 그 옆에 놓인 〈불씨〉(2021-2023)는 두 화자가 나타나 불씨를 퍼뜨리기 위한 방법을 서술한다. 두 화자의 목적은 똑같지만 행동과 속도는 대조된다. 적극적인 이동과 다소 소극적인 기다림의 태도 그럼에도 종국에는 함께 만나 결국 불씨를 초에 옮기는 것에 성공한다. 〈불씨〉로 인해 전시장은 하나의 연극무대처럼 꾸며지는데, 〈불씨〉에서 옮겨진 불은 〈촛대 03〉로 향하고, 또다시 〈불꽃〉(2023) 시리즈로 향하는 장면을 상상하게 한다. 〈메아리〉(2025-2026)는 벽과 유사한 표면을 가진 채 벽에 붙어 은밀하게 존재감을 드러내며 〈불씨〉 옆에 놓여 두 화자의 목소리와 공명한다.

 

차현욱의 회화는 전시장 안쪽에 자리 잡은 채 관람객의 발걸음을 이끈다. 아득해지는 성운과 역동적인 구름 풍경에 홀린 듯 그 화면 앞에 선다. 한지처럼 얇고 평평한 화면이 많은 것을 머금은 채 우리를 반긴다. 마른 붓질로 여러 색을 쌓아 올린 차현욱의 화면은 묘한 깊이감을 주는데, 그 깊이에 빠져들고 있노라면 화면 표면에 음각처럼 파고 들어간 흔적들을 발견하게 된다. 압력으로 눌린 자국에 수분이 스며들지 않아 남은 흔적인데, 화면의 물리적인 높낮이가 생겨 풍경을 한층 더 입체적으로 만든다.

작가가 그려내는 풍경은 기억과 현재가 만나는 지점이다. 과거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현재의 시점에 의해 사후적으로 계속해서 재구성된다는 점에서 작가가 포착하는 풍경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장면이다. 과거와 현재가 뒤섞이고, 현재의 시점과 충돌하며, 미래에 대한 시점이 끼어든다. 그런데 이 시제들이 선형적인 시간의 흐름으로 풍경에 반영되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작가 내면에서 규칙 없이 뒤섞여 새로운 풍경을 조작한다. 차현욱의 화면은 현존의 파열이 기록되는 장(場)으로, 실제와 허구, 현실과 비현실이 섞인 몽환적인 공간을 제공한다. 우리 눈앞에 펼쳐진 장면들은 시간의 경계가 무너진, 현재에 틈을 내는 풍경이 된다.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보이지 않는 것을 본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서구 사상에서 보는 행위는 사물을 대상화하며, 그것을 소유하는 행위이다. 그러나 우리는 온전한 소유를 불가능하게 하는 원천적인 파열이 있음을 알고 있다. 이 불가능성을 깨닫는 순간, 의미를 부여하여 모든 것을 이해하고 소유하려는 우리의 시선은 공백과 마주한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다.4) 그것은 나타난 것과 채워짐, 충만한 의미 이전에 존재하는 부재를 함께 보는 것이다.

 

 

글. 박지예 (미학관 큐레이터)


1) 조르주 아감벤, 『행간』, 윤병언 옮김, 자음과 모음, 2018, 15-16쪽.

본 문단에 서술된 스탄차와 시, 철학의 언어에 대한 설명은 『행간』 서문(9-18쪽)을 참조했다. 특히 시와 철학의 언어에 대한 표현은 “‘말의 분리’는, 시가 대상을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그것을 소유하는 반면 철학은 대상을 소유하지 못한 상태에서 파악한다는 뜻으로 해석된다.”(13쪽)를 글에 맞게 축약하여 인용하였다.

2) 위의 책, 273쪽.

3) 발터 벤야민, 『언어 일반과 인간의 언어에 대하여, 번역자의 과제 외』, 최성만 옮김, 도서출판 길, 2010, 77쪽.

4) “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다.”는 구절은 성경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히브리서 11:3)를 패러디한 표현이다. 우리 눈 앞에 보이는 현실세계 이전에 세계를 설계한 말씀(기원)이 있다는 의미인데, 말씀 이전에 부재가 있었다고 해석하며 원래의 의미를 전복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