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탄차
Stanza
2025.4.1.-4.10.
인천아트플랫폼E1전시장2(인천)
참여작가|박해선, 손승범, 이은지, 차현욱
기획|이슬비
도움|박지예
설치|서동해
사진|이서영
그래픽디자인|파이카(이수향, 하지훈)
주최주관|이슬비
후원|인천광역시, 인천문화재단, 토지문화재단
협력|미학관
들숨과 날숨의 중간, 스탄차1)
‘행간’을 뜻하는 ‘스탄차(stanza)'는 줄과 줄 사이의 간격, 문장 앞에 들여쓰기, 단락을 마무리하는 줄 바꿈, 단어와 단어 사이의 띄어쓰기 등을 의미한다. 아감벤(Giorgio Agamben)은 스탄차라는 개념을 통해 에로스와 시적 언어의 연관성, 시(詩) 공간 속에서 발생하는 욕망과 함께 유령 혹은 환영을 찾아내려 시도한다. 아감벤에게는 이 모든 예술의 요람이 되는 스탄차야말로 행과 행 사이의 경계이자, 욕망과 욕망의 대상 사이의 균열이 메워지는 공간이다. 로마 시대 말기 방2) 과 같은 주거 공간의 뜻으로 쓰이던 이 단어는 이후 일련의 시 형식을 일컫는 단어로 쓰다가, 단테에 의해 시의 정수가 모이는 곳이라는 의미를 더하게 되었다. 단테부터 아감벤까지, 이로써 행간은 어떤 은유의 공간이 된 것이다. 이미 ‘시의 거주지’로서 스탄차는 물리적 공간, 눈에 보이는 현실적 공간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주거 공간이라는 뜻에서 의미가 확장되었다면 이는 아마도 비어있는 방 혹은 손님을 맞이하는 방이 될 것이고, 시 문학의 어떤 문법적 규칙으로서 이해되었다면 이는 문맥의 흐름과 이해를 돕기 위한 수단이었을 것이다. 스탄차, 그것은 있음에도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며, 없음에도 인지할 수 있는 무엇이다. 이를테면 이것은 행과 행 사이의 빈 공간, 줄 바꿈으로 인해 아무 글자 없이 띄어쓰기만 존재하는 텅 빈 행이 될 것이다.
이는 또한 말하기 안에 숨겨져 있는 음절과 음절 사이의 공기의 흐름을 지시하기도 하는데, 예를 들면 숨을 들이마시고 내쉴 때의 그 사이, 아주 잠시 동안의 멈춤과 비움이 발생하는 순간을 지시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행간은 호흡과 같다. 들숨과 날숨의 중간, 산스크리트어로 ‘쿰바카(kumbhaka)‘는 호흡을 몸 안에 담아두는 것을 의미한다. 주로 요가에서 사용되는데, 스탄차를 굳이 어떤 행위와 비교하자면 이와 가장 유사할 것이다. 숨을 들이마시고 호흡을 그대로 몸 안에 보유하는 것, 그리고 숨을 깊게 내쉰 뒤 연이은 호흡을 멈추고 잠시 숨을 거르는 것. 쿰바카는 신체 밖에서는 아무 것도 일어나지 않는 고요함이며 오로지 그 숨을 보유한 자만이 느낄 수 있는 생동감이다. 스탄차는 눈에 보이지 않는 공기를 들이마시고 내쉬는 숨처럼, 마찬가지로 문장과 문장을, 단어와 단어를 연결해주는 멈춤이다. 흐름이라는 일종의 연속성이 있기 위해 필수적으로 동반되는 멈춤. 채우기 위해 비우는 것, 또는 채우고 비우기의 반복. 기억과 망각의 오래된 상관관계에도 이와 같은 변증법적 나아감이 있다. 기억의 연속성을 유지하기 위해 망각이 전제되듯이, 모든 비워짐이 채움에 앞서 존재한다. 스탄차는 연결을 위해 존재하며, 그러기 위해 비어있다.
이는 점점 더 가속화되는 현대사회의 어떤 흐름 속에서 멈춤의 의미를 되새기는 것과 같다. 현대사회의 시간 감각 속에서 무언가를 멈추고 들여다본다는 것은 그대로 도태되거나 적응하지 못하는 일로 여겨지곤 한다. 이 전시는 행간, 즉 스탄차라는 단어가 지시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의 공통적인 특징으로 ‘비워내기’ 혹은 ‘덜어냄’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시의 거주지로서 스탄차가 띄어쓰기와 같은 보이지 않는 것이라면, 이는 눈에 보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있음’으로 인지하고 작동하는 방식에 대해 이야기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이 전시는 이러한 비가시적인 장소에 각자의 방식으로 무언가를 채워 넣는 작업을 모은다. 이들이 채워 넣는 방식 혹은 무언가를 채워 넣는 행위는 서로의 행간을 해치지 않으면서 동시에 존재하고, 숨결처럼 서로를 보이지 않는 곳에서 지지한다.
박해선은 “쓸모를 다한 파편, 상실의 찰나, 시작과 완결 사이의 여백, 목적을 담지 않은 속성, 이름이 사라진 현장의 이미지 조각”들을 수집하며 그려왔다. 잠깐 피고 지는 꽃, 곧 녹아 없어질 얼음, 필요한 부분만 도려내 남게 된 종이 조각 등. 사라질 존재에게 캔버스 표면에나마 머물 자리를 마련해준다는 작가는 다시 그들에게 공간을 제공한다. 〈무너지고 세워지는 이름〉(2024) 시리즈는 자투리 나무판에 소실될 것들을 그린 후, 돌이나 그림을 그린 나무판끼리 포개고 쌓아 서로를 딛고 선다. 사라져버릴 미약한 사물들은 그렇게 동일한 힘을 주고받으며 멈춰있는 상태로 현재 속에 머물면서 하나의 맥락을 형성한다.
손승범은 오랜 기간 동안 기원이나 추앙의 대상이 되는 기념비적인 사물과 눈길도 닿지 않고 이름조차 없는 잡초를 병치한 이미지를 그리거나, 버려지고 방치된 물건들을 수집하여 기념비 형태의 오브제로 치환한다. 그의 작업은 정반대의 것들이 서로의 의미를 퇴색시키는 동시에 서로의 의미를 부각시키며 한 화면에 공존한다. 기억됨과 경건함, 새로운 것이 잊혀짐과 동시에 사소함, 버려지는 것을 전제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손승범의 작업은 대비되는 사물의 동등한 배치를 통해 전시 주제인 스탄차의 작동 방식을 시각화하여 드러낸다.
다른 한편 이은지는 두루뭉술하지만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것들에 관심을 둔다. 특히 기의와 기표 간의 관계에 주목한다. 기표를 획득하지 못해 서성이며 부유하고, 명확하게 특정 지을 수 없는 형상을 ‘덩어리’로 상정하고, 다양한 덩어리를 만들고 그 덩어리와 연결되는 다양한 주제들을 덩어리에 이름 붙인다. 덩어리는 물리적으로 변하지 않지만, 붙이는 이름에 따라 계속해서 다른 의미를 획득해 간다.
차현욱은 경험을 바탕으로 그림을 그린다. 경험을 ‘지금’ 그림으로 나타낸다는 것은 과거가 현재의 시점에서 재구성되거나, 예지된 미래를 과거에 중첩시키는 과정을 지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경험’은 본질적으로 균질적인 집합일 수 없다. 과거, 현재, 미래가 선형적으로 이어지지 않고 경험의 파편 속에 중첩되어 어떤 연속성에 틈을 낸다. 작가는 경험의 파편들을 엮으며 산수화의 형식을 통해 가시화한다.
이들은 각자의 행간을 유지하며 비움을 대체한다. 이들의 작업을 통해 스탄차의 보이지 않는 형태를, 그 장소를, 위치를 더듬어보자. 성급히 대상을 의미화하여 소유하기보다 그 안에 녹아들 것. 의미의 작동이 멈춘 지점, 단순히 숨을 참는 것이 아니라 숨을 몸 안에 가두어 둠으로써 그 안에서 발생하는 미세한 변화를 발견해 볼 것. 《스탄차(stanza)》는 비가시적인 것을 드러내기 위해 애써 어떤 시각적인 형태를 부여하기보다 이들의 작업 안에서 행간을 찾아내려는 시도에 가깝다.
1) 이 전시의 제목으로 사용된 스탄차는 『행간』(Stanze, 1977)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어 국내에 소개된 조르주 아감벤(Giorgio Agamben)의 책에서 차용하였음을 밝힌다.
2) 라파엘로의 명작 중 하나인 〈아테네 학당〉(The School of Athens, 1509-1510)이 그려져 있는 바티칸 궁의 교황의 집무실 또한 ‘라파엘로의 방(Stanze di Raffaello)’이라고 불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