꿀렁꿀렁 쑤욱 쓰윽

Lumpy Bumpy

2022.06.03. - 2022.06.26


Artist. Mirae Kim

그림이라는 속도

김미래의 《꿀렁꿀렁 쑤욱 쓰윽》


작가 김미래는 임신 중에 느낀 감각을 드로잉으로 묘사하고, 전시 제목을 그 느낌에 대한 의태어로 삼았다. 김미래가 자신의 감정을 언어로 묘사하는 일에 대해서 다소 못 미더워하고 그래서 보다 정확하게 감정상태를 표현하기 위해 드로잉을 선택했음을 안다면, 이러한 선택은 흥미롭다. 사실 한국어는 의성어와 의태어가 유독 많은 언어이지만, 작가는 그런 모국어의 그물조차 자기 감정을 모두 건져올리는 데에는 헐겁다고 느끼는 듯 하다.


사실 그도 그럴 것이 감정은 언어로 표현되는 것보다 복합적이고 또 시시각각 변한다. 한 단어로 온전히 포착되지 않는 감각을 느껴본 일이 있을 것이다. 마냥 행복하기만 한 경우도 있지만, 우리는 기쁘면서 못내 미심쩍기도 하고, 우울하지만 내심 안도감을 느끼는 등 복수의 감정들을 한 번에 느끼는 경우가 많다. 김미래가 그러했다. 아이를 밴 시간 동안 작가는 양가적인 감정을 한 몸에 안고 있었다. 그래서 “무서운데 재미있고, 즐거운데 짜증나며, 기쁜데 슬펐다”고 말한다. 전시의 제목을 의태어로 삼은 것은 일단 여러 감정들이 자기 안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는 움직임을 포착하기 위함이었을 지도 모른다. 꿀렁꿀렁하고 쑤욱쑤욱하고 쓰윽쓰윽하게 몸 안팎의 변화가 일어나고 있음을 작가는 원거리에서 의태어로 적는다. 그리고 근거리의 결들은 다시 드로잉으로 정돈된다. 김미래는 자신의 몸 안쪽에서 여러 온도의 감정이 뒤섞이고 변하는 과정을 겪는다. 반대되는 감정이 서로 맞부딪치고 엉기는 일은 마치 밀물과 썰물이 반복되는 바닷가와도 같다. 해초를 떠올린 것은 그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전의 드로잉에서 자주 등장하는 돌멩이 무더기와 껍질 질감이 느껴지는 나무숲은 이번에도 어김없지만, 의인화된 해초가 등장하는 모습은 일렁이는 감정의 조수간만 아래에서 물결에 따라 휩쓸리는 모습을 상상하게 한다. 

그런데 결국 어떤 식으로든 이것은 묘사이고, 감각에 뒤쳐진 속도를 가질 수밖에 없는 일이다. 그리는 속도는 심상이 떠오르는 속도를 따라잡을 수 없다. 샤프펜슬로 그리다보면 그 심상은 이미 쓸려나가버리거나 아니면 갑자기 들어차서 바뀌었을 수도 있다. 감정이 밀물로 들어와서 이를 그리고 있는 중에 감정은 썰물로 밀려나가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작가는 그리는 중에도 그러한 변화를 조금씩 반영하려는지, 드로잉의 일부를 지우고 다시 그리기를 반복한다. 지우개로 지운 자국이 흐릿하게 남아있기도 한데, 그것은 바로잡기 이전에 느낀 심상의 잔상이다. 몇 번 그림 위로 안개가 드나들고 나면 김미래는 픽사티브를 뿌려서 자신의 느낌을 상기하는 일을 멈춘다. 이때 작가의 감정은 어떤 속도로 멈춘다. 속도 자체가 멈추는 것이 아니라, 느낌에 대한 속도가 멈추는 것이다. 이것은 그림의 속도이기도 하다. 작가는 자신의 글쓰는 재주보다 그리는 재주를 더 미더워하기에 느낌을 평면 위에 옮기는 것이기도 하겠다. 그러나 글은 문장의 꼬리에 꼬리를 물고, 감정은 그 문장을 따라 장사진을 이룬다. 그림은 화면 위에 모두 담겨있고 감정은 그 면적 위에 여기저기 기록된다. 김미래의 작업에는 서사가 있지만 그 서사는 선 위에 연이은 것이라기보다 해변처럼 뒤척이고 열꽃처럼 번져 있는 가변적인 이야기이다. 김미래는 이 가변적인 상황을 화면 안에 담고 옮기고 빼내다가 어느 시점에 정착액과 함께 화면에 안착시킨다. 작가가 바라는 것은 그 감정상태를 가장 적확하게 묘사하는 것이라고 했지만, 이 문장을 좀 더 적확하게 묘사하자면, 그 감정상태를 가장 남기고 싶은 상태로 묘사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것이 비록 뒤쳐질지언정 그리는 속도로 완성되는 자신의 드로잉이다.


이 지점에서 김미래의 드로잉은 그림이라는 속도를 곱씹게 만든다. 그림은 결코 가변적인 감정의 빠르기를 따라잡을 수 없는데, 그걸 따라잡는다는 것은 사실 그리는 사람이 되어버린다는 일, 그림이 재현자가 되어버린다는 불안을 가져올 수 있는 일이다. 그림은 그럴 수 없는 아쉬움을 통해서 재현자와 분리된다. 그림이 그림자를 본뜬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어떤 우화는 그림을 대상과도 분리시키지만, 대상의 그림자와도 분리시킨다. 대상의 상태를 응결시킬 수 있고 진열시킬 수 있다는 안도감은 종전에 설명한 아쉬움의 옆자리에 있다. 그것은 운동성을 상실했지만, 역설적으로 재현자를 저만치에서 따라오는 아쉽지만 감당할만한 속도이다. 김미래의 그림에는 우화와도 같은 서사가 중첩되어 있지만, 결국 지금은 떨어져 나간 머리카락이나 손톱처럼 당사자의 당시의 속도가 가장 잘 머물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김미래의 작업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작가 자신을 에워싼 감정보다도 그 감정을 표현하려 뒤따라가는 샤프펜슬보다도 드로잉 위에 픽사티브를 뿌려서 하나의 상태를 마무리하는 일인 것 같다. 감정이 들고 심상이 떠오르고 재현이 진행되는 그 각각의 시차를 마무리짓는 일, 자신의 속도를 꾸준히 응결시키는 일이 어쩌면 가장 중요한 일인지도 모른다. 다섯 점의 드로잉은 “꿀렁꿀렁 쑤욱 쓰윽”한 속도로 남은 지난 열 달 간의 김미래인 것이다.



글. 이문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