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을 분실하는 ‘어제’가, ‘지금’을 상실한 ‘금방’이, ‘여전히’ 뒤로 스며드는 ‘아직도’가 그 사람의 등 뒤에 새겨진다.1) 함성주가 ‹vintage_sifiart Roy_›(2024)를 끊임없이 생산하는 모습을 멀찍이서 바라본다. 용량에 맞게 삭제한, 간신히 그의 아이폰 사진첩에서 살아남은 이미지가 견고히 팔레트 맡을 지킨다. «Damage over Time»은 100개의 2호 캔버스와 하나의 100호 캔버스로 구성된다. 지난 몇 달간 그는 ‹vintage_sifiart Roy_›들을 계속해서 살피고, 완성된 ‘오늘’의 캔버스를 망각한 채 ‘어제’로 돌아가 ‘아직도’ 그린다.
함성주는 캔버스 천을 벽에 걸고 붓질을 한다. 적당한 어둠이 쌓이면 직접 만든 툴로 조금씩 닦아내며 대비를 만들어내는데, 이때 미세하게 힘을 조작하기보다 자연스러운 붓끝의 압력으로 벽에 새겨진 요철을 찍어냄으로써 ‘매끄러움seamless’ 미학에 대해 반항한다. 붓을 쥔 손의 압력은 간혹 몸집을 키우며 크고 검은 구멍으로 우리를 데려가지만, 물질의 그림자를 토해내며 다시 입 밖으로 꺼낸다. 무수히 많고 다른 스트로크와 이름 모를 자국들은 강박적으로 같은 이미지에 천착한다. 반복되는 화면은 마치 아이폰 액정처럼 깜빡이고, 작가는 익숙한 터치 감각을 빌려 엄지와 검지로 확대하거나 밝기를 조절하고 무드를 설정하는 방식을 원시적으로 캔버스에 옮긴다.
‹vintage_sifiart Roy_›는 통창의 전시장을 장악한다. 별안간 맞닥뜨린, 한정된 맵을 누비는 게임의 배경처럼. 전시명 ‘Damage over Time’은 게임에서 특정 시간에 걸쳐서 연속적으로 유발되는 피해를 의미하며, ‘장판 깔기’라는 은어로 대체되기도 한다. 작가에게 장판은 캔버스라는 다중/물질적 차원으로 해석되고, 그 안에서 생성되는 경향성을 레이어를 쌓거나 색을 휘발하는 방식으로 계속해서 척결하거나 누락시킨다. ‹vintage_sifiart Roy_›라는 다소 난데없는 제목은 이미지 검색으로 추적한, 그것의 역할이나 나름의 정의로 이루어진 캡션으로, 누군가 이미 플레이한 과거를 복기시키며 등장한다. 앨범에 저장되는 순간 휘발되는 이미지의 워터마크로 기능하며, 픽셀이 깨지고 레이어가 쌓이며 불명확해진 출처의 단서로 남는다.
이번 판에서 작가는 거센 공격을 퍼붓는 대신 덫을 설치하여 이탈하는 것들의 아픔을 유예시키고, 참전한 ‘객체’로 배회하며 요정과 늑대처럼 세계 속에 풀려난, 무시할 수 없는 자율적인 힘2)을 발휘한다. 힘을 빼지 않는 태도는 일종의 공격이다. 공격의 시도가 방어의 시작이기도 하듯이, 함성주는 전시Wartime라는 공격과 방어의 굴레로 우리를 초대하여 전용할 수 없는 무기와 전술들을 몰아넣고 이를 골고루 펼쳐놓는다. 예기치 못한 전시를 맞닥뜨린 참전자는 관망하거나, 숨을 것이며 혹은 무기를 쥐고 전투태세로 몸을 갖출 것이다. 작가는 몸을 비틀어 피하지 않고 흉과 흔이 될 공격과 방어를 맞이한다.
살아남았나요? — 네. ‘아직도’요.
글. 이지언
1) 조재룡, 「트랑스의 사건」, 유진목 『연애의 책』평론, p. 85
2) 그레이엄 하먼, 『네트워크의 군주』, 갈무리, 2019, p. 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