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학관 美學館 MIHAKGWAN Philosopher's Stone

Die Blendung: 나의 작은 서재 그리고, 

Die Blendung: My Little Den and

2025.3.14.-4.13.


참여작가|박우수리 Suri Park Woo

서문|박지예 Jiye Park

리뷰|김도연

사진|황태흠 

눈꺼풀이 닫히는 순간 출몰하는 것들에 관하여

 

우리가 어떤 사물을 바라볼 때 그 사물도 우리를 응시한다. 예컨대 『율리시스』의 스티븐 디덜러스는 푸른빛의 바다를 점액 빛의 초록색으로 바라보며 어머니가 사망하기 전 뱉어냈던 담즙을 연상, 상실된 어머니를 불러내게 된다. 중립적이고 투명한 사물로 보이는 것도 개별적인 상실을 짊어지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보는 행위’는 일반적으로 수행했던 소유의 기능(지식을 습득하고 사물을 대상화하는 인식작용)과는 정반대의 역할을 하게 된다. 이제 보는 행위는 상실된 것에 의해 지탱되고 관계되는 한에서 잃어버리는 것이 된다. 우리는 보는 행위를 통해서 공백을 부여받는다.1)

 

역설적이게도 우리는 두 눈을 부릅뜬 채 우리를 응시하는 상실을 바라보는 것이다. 볼 수 없는 것을 바라보는 것. 사유가 재현할 수 없어 비가시적으로 우리에게 드러나는 것. 의미 체계로 소화할 수 없어 의미 체계에 균열을 내는 것. 그것은 상실되고 사라졌으나 다시 돌아오는 유령이다. 그럼에도 모든 것에 의미를 부여하여 무결한 세상을 만들고자 하는 인식 체계는 이내 자명하게 보이는 것만을 믿고, 유령의 소거를 시도한다.

 

박우수리는 소거의 시도를 경계하며 이 유령에 주목해왔다. 작가가 바라보는 이 유령은, 사회가 “무슨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보호하려고 애쓰는 자신의 구성원을 해칠지도 모르는 폭력의 방향을 돌려서, 비교적 그 사회와 무관한, 즉 ‘희생할 만한’ 희생물에게로 향하게 한”2), 대체용 희생물이다. 폭력이 들이닥쳐도 복수의 위험성이 전혀 없는 가장 나약하고 소외된 대상. 《Die Blendung: 나의 작은 서재 그리고,》는 작가가, 무자비한 폭력에 노출된 흰 양에서부터 사회적으로 단절된 채 결핍이 전부였던 여성 마카베아3) 그리고 아직 호명되지 않아 신체를 부여받지 못한 흩어져 있는 존재들을 자신의 화면에 불러내는 전시이다.

 

미학관은 타인에게 허락되는 영역이 없는 “숙명적으로 조용하고 어둡고 잘 보이지 않고 이기적”이고 유아론적 공간인 서재로 전환되었다.4) 큰 벽을 가득 메운 〈나의 작은 서재 그리고,〉(2025) 속에 마카베아의 유령과 작은 벌레가 〈몇 개의 문을 거쳐 너에게 오던 길〉(2025)을 통로 삼아 침범하고 있다. 배제하고 싶은 불편한 존재, 이미 상실되어 망각된 존재들이 되돌아왔다. 이들은 이곳에 있으면서 화면을, 미학관 공간 자체를 오염시키고 있으나, 비가시적으로 드러나기 때문에 인식 체계로는 포착할 수 없다. 인식 체계가 잠시 정지하는 ‘눈 깜빡’하는 순간 우리를 응시하는 것을 바라보고 환대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계속 바라보고자 노력해야 한다. 눈꺼풀이 닫히는 순간 출몰하는 것들에 관하여.5)

글. 박지예


1) 본다는 것의 피할 수 없는 분열에 관한 이야기는 조르주 디디-위베르만의 『우리가 보는 것, 우리를 응시하는 것 Ce que nous voyons, ce qui nous regarde』의 「L’inéluctable scission du voir」 장에 기반한다.

2) 르네 지라르, 『폭력과 성스러움』, 민음사, 2003, p.14. 

3) 박우수리 전시의 모티프가 되었던 대상들이다. 몽둥이와 흰 양의 관계(2023), 《마카베아에게(2024)

4) 작가노트

5) 전시명 중 독일어 <Die Blendung>와 연관 있는 문장이다. 독일어 Die Blendung는 작가가 이번 전시의 모티프로 삼은 책(엘리아스 카네티, 『현혹』, 지식의 숲, 2007)의 원문 제목이다. Die Blendung는 일시적인 실명 상태를 뜻하는 말로, 작가는 일시적인 실명 상태 혹은 방전이 되어 앞이 보이지 않을 때(인식 체계가 멈춘 동안)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유령과 벌레를 상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