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학관 美學館 MIHAKGWAN Philosopher's Stone

Gift Fluid

2026.4.17.-5.17.


참여작가|양승욱

기획 & 글|이슬비 

포스터디자인|김헵시바, 민동인

사진|양승욱

주최주관|미학관

후원|한국문화예술위원회 창작주체

미련의 증여, 혹은 조건 없는 증여라는 허구 


조건 없이 순수하게 선물을 한다는 것이 가능할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것은 불가능하다. 역사적으로도 그러했고, 아마 앞으로도 불가능할 것이다. 인류학자 마르셀 모스(Marcel Mauss)가 『증여론』(Essai sur le don: Forme et raison de l'echange dans les societes archaiques, 1925)을 통해서 이미 이야기했듯이, 인류의 교환 체계 안에는 순수한 형태의 선물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모스에 따르면 선물은 관계 형성을 위한 사교적인 행위로도 읽을 수 있다. 다시 말해, 이는 선물, 즉 증여가 교환의 목적을 잠재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한데, 이때의 교환이란 반드시 물질적인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마르셀 모스는 포틀래치(Potlatch)의 사례1)를 빗대어, 증여가 지닌 ‘주어야 하는’ 의무와 ‘받아야 하는’ 의무, 그리고 ‘답례해야 하는’ 의무를 드러낸다. 이렇듯 모든 선물은 가시적, 비가시적 보답의 의무를 전제하며 이는 사회적 관계를 유지하는 호혜성(reciprocity)의 골조를 형성한다.2) 그러나 양승욱의 작업은 바로 이 지점, 상호적인 호혜성이 아닌 일방적인 증여를 통한 관계 형성에 주목한다. 그의 작업은 금전적으로 거래되지 않고 선물로 존재하며, 투자 가치나 상품으로서의 가치가 아닌, 증여됨으로써 수익자가 갖게 되는 ‘답례해야 하는 의무’를 빚으로 떠넘긴다. 버려진 물건의 수집과 작품으로서의 가치 전환,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소진함으로써 자본주의의 축적의 합리성에 배반하는 바타유(Georges Bataille)식의 증여. 양승욱의 작업은 바로 이 지점에서, 비워내고자 하나 결코 비워낼 수 없는 소유의 잔여와 주고자 하나 결국 부채를 남기게 되는 증여의 모순을 가로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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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장난감, 퀴어 등 양승욱을 떠올렸을 때 생각나는 몇 가지 특징들이 있다. 나는 지나치게 선명한 사진, 높은 채도의 색채와 고밀도로 구성된 여러 장소와 인물, 장난감을 촬영한 사진들이 먼저 떠오른다. 대비가 심하고 과하게 선명한 그 사진들은 어딘가 과잉되어 있다. 이 과잉된 무언가는 사진 속 공간을 채우는 사물일 수도 있고, 사진의 색감이나 채도일 수도 있고, 우리가 그의 작업을 보았을 때 느끼는 어떤 기분이나 감정일 수도 있다. 그의 작업은 적당히 유머러스하고, 적당히 자조적인 데 반해 항상 어딘가 넘쳐있다. 인스타그램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감성마저 레디-메이드 된 보기 좋은 따뜻한 사진들과 달리 그의 사진과 설치 작업 전반을 관통하는 이 과잉된 에너지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넘침과 과잉은 잉여를 만든다. 그리고 양승욱의 작업에서 나타나는 잉여는 어느 순간부터 타인과의 관계로 자리를 바꿔 앉는다. 

  그의 초기 작업은 〈Fast toy〉(2013-2015)와 같이 장난감들이 마치 세상을 잠식하듯 사진 속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었던 반면, 점차 사진 속 장난감들이 자아를 가진 행위자처럼 연출되기 시작한다. 성행위를 모사하는 〈Play toy〉(2017) 시리즈나 2023년의 개인전 《유랑극단》(유아트스페이스, 서울, 2023)에서 선보인 일련의 사진들과 같이, 집회나 축제에서의 군상을 대체한 인형들은 마치 인간을 대신하여 무대 위로 올라간 듯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에게 장난감은 개인의 기억과 유년기를 상징하는 사물이자, 성인기의 결핍과 관계의 부재를 메우는 감정적 매개체이다. 장난감이 사물에서 작품으로, 대상에서 주체로 옮겨가는 무대가 사진이자 전시장인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제 사진이지만 제 작품이 아닙니다〉(2017-2021)부터는 아예 대상이 되는 타인이 없으면 불가능한 작업이 된다. 그는 자연스럽게 취미이자 습관이 된 다른 사람들의 전시 사진 기록이 어느 정도의 양을 넘긴 이후부터 자신이 드러내는 어떤 형식상의 통일성을 띠게 되는 것을 발견하고 이것을 하나의 작업으로 선보인다. 그리고 전시장에 방문한 실재 해당 전시의 주인공이 자신의 사진을 발견하였을 때, 그것을 떼어가도록 한다. 이는 사진 연작이자 일종의 관객 참여형 작업으로, 〈남는 건 사진뿐〉(2023)에서는 다른 사람의 사진과 나눔의 형태가 좀 더 적극적인 양상을 띤다. 장난감부터 사진, 설치, 그리고 이것을 가져가게끔 만드는 행위 자체가 양승욱의 작업이 전반적으로 타인과의 관계를 전제로 이루어져 있음을 보여준다. 다소 상투적으로 들릴 수 있겠지만, 이 단어는 양승욱의 작업에서 꽤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내가 짧게 지켜본 바로, 그는 언제나 작업에서 타인의 자리를 남겨두었다. 늘 카메라를 들고 다니는 그는 자신의 작업과 일상을 완전히 분리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그가 바라보고 겪은 모든 것들은 그의 작업의 일부가 된다. 그렇기 때문에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비롯되는 여러 층위의 감정이 사진에 뒤섞여 드러나는 것이다. 사진을 찍는다는 행위는 그 순간의 관찰자를 자처하는 일이다. 사건이 발생하는 현장에서 한 걸음 물러나 기록하는 관조적인 태도는 죽어가는 조부모의 모습을 사진으로 담은 〈Home, Sweet Home〉(2018)에서 더욱 극단적으로 나타난다. 현실로부터의 거리두기와 개입 사이의 내적 갈등이 사진 속에 담겨있다. 양승욱에게 카메라는 마치 타자와의 거리를 확보하는 동시에 그 거리를 좁히지 못해 안달하는 욕망의 창구처럼 보인다. 여기서 사진 촬영은 단순히 과거를 기록하고 보존하려는 행위가 아니라, 관찰자가 대상에 품고 있는 애정과 측은함, 그리고 지우지 못하는 미련을 시각적 데이터로 치환하는 방법인 듯하다. 

 타인과의 관계가 가장 크게 증폭된 것은 역시 2025년 개인전 《이웃, 사촌》(레빗엔타이거 갤러리, 서울, 2025)이다. 《이웃, 사촌》에서는 다른 사람들이 전시장에 놓인 물건(혹은 그의 작업)을 가져가는 방식 대신, ‘다른 사람들’ 자체를 피사체로 옮겼다. 가족, 연인, 친구, 반려동물 등 양승욱이라는 사람의 주변 모든 것이 그의 작업에 등장인물이 되었다. 혹자는 동의 없이 사진을 사용한 것에 대해 초상권 침해라고 비난할 수 있겠으나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뉴스나 보도 기사에서 일반 시민들의 얼굴이 모자이크 없이 그대로 나왔던 것을 생각한다면, 양승욱의 작업에 조금 너그러워져도 좋지 않을까. 현대적 법익의 시비를 넘어서, 이 지독한 기록의 편린들은 서로에게 어떤 흔적을 남기며 살아가는지를 목도하게 되는 거대한 관계의 아카이브로 존재한다. 이렇게 그의 초기 작업은 개인의 사적인 감정과 기억이 재조립된 형태로 장난감을 비롯한 여러 사물을 통해 시각화되는 반면, 최근에는 점차 타인과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면서 사회적 관계 속으로 환원되는 지점을 통해 지속적으로 확장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과정에는 이미 예전부터 나눔의 형태가, 증여라는 방식이 예견되어 있었다. 이번 전시에서는 그것을 더욱 전면으로 내세우기에 이른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빼곡한 선반 위로 장난감들이 가득 차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양승욱이 10여 년에 걸쳐 수집한 이 장난감들은 각기 다른 시공간에서 왔다. 낡고 오래된 장난감들의 물신적 가치 전도, 사물에 깃든 본래의 맥락을 제거하고 무작위로 자신의 서사 안으로 끌어들인 작가는 이를 통해 자신이 구축한 세계의 거식증 같은 풍요로움을 대변함과 동시에 과거의 파편들을 현재에 붙잡아 두려는 강박과 미련이 가시화된 장소로 대두된다. 알록달록한 장난감 특유의 색과 질감이 풍요를 가장한 결핍의 반증으로서 시각적 과잉을 드러내며, 이윽고 이를 선물이라는 이름으로 무너뜨린다. 양승욱은 증여의 굴레에 스스로를 옭아매면서 타자와의 필연적인 얽힘을 자초한다. 

 조르주 바타유는 완전한 소진, 완벽한 낭비야말로 자본주의 시대의 합리성을 배반하는 주권적 행위임을 강조했다.3) 그는 마르셀 모스에 의해 부정된 ‘순수 증여(don pur)’의 가능성을 완전한 소진, 소모를 통해 가늠하고자 했다. 모스가 증여를 사회적 결속을 위한 호혜적 의무의 교환으로 보았다면, 바타유는 아무런 보답을 기대하지 않는, 심지어 증여자 자신이 파괴될 정도의 비생산적인 소모에서 주권적 자유를 발견했다. 여기에서 데리다(Jacques Derrida)는 한 발짝 더 나아가 시간을 중심으로 증여의 불가능성을 이야기한다. 그에 따르면 선물은 선물로 인식되는 그 순간 사라지는 것이며4), 그렇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무력하다. 


양승욱은 이번 전시에서 다음의 세 가지를 시도한다. 조건 없이 주기, 남김없이 비우기, 미련 없이 보내기. 아마 세 가지 모두 실패할 것이며, 그도 그것을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주고받는 행위 속에 분명 남겨진 것이 존재할 것이고, 그는 사라진 사물에 대한 미련을 관계에 투영하여 오래도록 지속하길 원할 것이며, 이 모든 것이 선물의 조건이 되어 작동할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완전한 증여란 본질적으로 무력하다. 그리고 인간은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는 라캉의 유명한 명제처럼, 자신의 삶과 작업, 정체성이 유동적으로(fluidly) 흘러갈 것임을 암시한다. 관계 속으로 편재되길 바라는 것은 그의 오래된 장난감들보다 양승욱이라는 사람 자체이지 않을까. 나는 양승욱의 작업을 좋아한다. 지겹게 질척거리는 애정으로 뒤덮인 뷰파인더 너머의 그의 시선을, 쉽게 잊지 못하고 과거를 떠안는 장난감 아카이브를, 그리고 그것을 결국 전부 버리지 못하고 모두에게 떠넘기는 것을 선택하는 미련을 좋아한다. 그리하여 나는 이 글을 양승욱에게, 기꺼이 선물로 바치고자 한다.

글. 이슬비


1) 포틀래치는 치누크어로 ‘식사를 제공하다’, ‘소비하다’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마르셀 모스, 『증여론』, 이상률 옮김, 서울; 한길사, 2002, 54쪽) 이는 북아메리카 태평양 연안 인디언들의 의례이자 축제를 지칭한다. 마르셀 모스는 인디언의 족장이 다른 집단의 권력자에게 부와 권력을 과시하기 위해 서로 경쟁적으로 선물을 주고받는 행위가 오가는 포틀래치를 보면서 과도한 증여와 파괴에 이르는 낭비를 목격한다.


2) 마르셀 모스, 『증여론』, 이상률 옮김, 서울; 한길사, 2002, 28-29쪽 참고 


3) 조르주 바타유, 『저주받은 몫 – 일반경제 시론-소진/소모』, 최정우 옮김, 서울;문학동네, 2022. 


4) “솔직히 말해서, 선물은 개인이든 집단이든 간에, 선물하는 주체에게 있어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선물로서 나타나거나 그 의미를 지녀서는 안 된다. 선물이 선물로서, 즉 '그 자체로서, 그 현상, 의미, 본질 그대로' 드러나는 순간부터, 그것은 빚의 의식적 순환 속에서 선물을 무효화시키는 상징적, 희생 적, 혹은 경제적 구조에 얽히게 될 것이다. 선물이라는 의도적 의미를 담고 있는 한, 단순히 주려는 의도만으로도 자신에게 대가를 돌려주는 것이 된다.” (Jacques Derrida, Given Time: I. Counterfeit Money, Peggy Kamuf, New York; University of Chicago Press, 2017. p.23, 필자 강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