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학관 美學館 MIHAKGWAN Philosopher's Stone

문지방을 밟지 마세요

Never Step on the Threshold

2026.8.7.-8.30.


참여작가|김영현, 송지유, 오로민경, 이희경

기획 & 글|박지예 

포스터디자인| 마카다미아 오

사진|양승욱

주최주관|미학관

후원|한국문화예술위원회 창작주체

#1

“종순아, 내 새끼 문을 열어주렴”

“아버지, 들어오셔요”

 

#2

“일단 창가로 가서 창문을 여세요.

할아버지가 당신을 지켜주실 거예요.

… 문을 열라니까!!!”

 

- 장재현 감독, 파묘(2024)

 

유명한 영화의 장면으로 이야기를 시작해봅니다. 인용한 장면에서 문밖의 존재는 친숙한 자의 목소리를 빌려 안에 있는 사람이 문을 열도록 유도합니다. 문이 열리는 순간, 문밖에 있던 귀신은 비로소 내부 공간으로 들어옵니다. 영화에서 귀신은 내부에 들어오자마자 문을 열어준 자를 죽여버립니다. 귀신은 타인을 죽일 수 있는 힘을 가졌음에도, 안과 밖을 구분하는 문을 스스로 넘지 못합니다. 속이고, 달래고, 어르고, 겁을 주면서 안에 있는 사람이 문을 열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습니다. 경계를 넘을 수 없는 귀신. 귀신을 차단할 수 있다면 바깥의 존재에 대한 공포는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일까요?

 

영화로 시작한 김에 영화의 어법으로 공포를 조금 더 들여다보고자 합니다. 일본의 시나리오 작가 코나카 치아키는 공포영화의 방정식으로 “장소의 부자연스러움(場所の不自然さ)”을 이야기합니다.1) 여기서 장소란 폐가나 어두운 숲속처럼 일상에서 벗어나 있는 음산한 공간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있을 수 없는 곳에 사람이 서 있는, 바로 그 위치를 말합니다. 귀신은 언제나 어긋난 장소에 있습니다. 그것은 시선의 사각지대이자 익숙한 공간의 바깥이어서 우리는 외부의 존재를 바라보지 못합니다. 공포는 장소와 존재의 관계가 어긋나는 순간 발생합니다. 파악할 수 없는 존재가 주는 공포. 그 공포 속에서 문을 열어달라는 소리가 들릴 때 우리는 문을 열어줄 수 있을까요? 우리는 밖의 존재를 파악할 수 없는데, 귀신이라고 단정 지을 수 있을까요? 문밖의 목소리는 누구일까요? 어쩌면 경계에서 밀려나버린 다른 존재가 내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문의 밖과 안 사이에 있는 문지방을 주목해봅니다. 문지방은 예전부터 안과 밖을 구분하는 사이 공간으로 여겨졌습니다. 집에서 장례를 마치고 시신을 들고 나갈 때 망자가 이승을 떠나지 못하고 다시 돌아올까봐 문지방 위에 바구니를 올려놓고 관으로 바구니를 깨면서 나가는 의식을 하거나, 객귀 물리기를 할 때 환자를 문지방을 베개 삼아 눕힌 채 굿을 하는 등 문지방은 실제 의례가 진행되는 공간이기도 했습니다. 안과 밖을 가르는 사이 공간을 터부시하며 문지방을 밟지 말라는 금제가 이어져 왔던 것입니다. 《문지방을 밟지 마세요》는 이 경계에 대한 금제와 귀신 이야기를 앞세워, 사람이 있을 수 없다고 생각되는 장소에 위치한 어긋난 존재들을 소환합니다. 파악할 수 없는 존재가 주는 막연한 공포와 응답을 전제하는 그들의 목소리 앞에서 우리는 어떤 자세를 취할 수 있을지 문지방 앞에 서서 생각해봅니다. 문을 열어 안으로 들이는 것과 끝내 문을 닫아두는 것 사이에서, 전시는 경계 너머의 존재를 마주하는 서로 다른 태도들을 살펴봅니다.

 

김영현은 마무리하지 못한 문장들을 내뱉으며 절로 모았던 두 손의 경험을 화면에 기록합니다. 기도하는 손은 두 손이 겹쳐져 있지만, 손 사이 공백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손과 손, 면과 면, 얼굴과 얼굴, 이전과 이후. 서로를 마주하지만 끝내 포개지지 않는 관계들을 꿈에서 마주한 뜬금없는 도상처럼 약간은 뭉개진 형태와 뿌연 색감으로 그려냅니다.

 

송지유는 평소 느끼는 감각을 고요하고 세밀하게 모아서 나무조각, 드로잉, 와이어, 밀랍, PLA 필라멘트 등 다양한 소재를 사용하여 가시화합니다. 일상에서 건져낸 기억을 시(詩)로 짓고, 시 문구를 다시 손으로 빚은 것 같은 작가의 작업을 전시장 곳곳에 놓음으로써 관람객이 세상과 대상을 대하는 작가의 태도와 방식을 따라 다시금 대상을 바라보게 합니다.

 

오로민경은 일상이 폐허가 된 어느 사건 이후의 삶들을 SNS를 통해 목격하였습니다. 그러나 작은 휴대폰 속 이미지는 실제에 닿지 못하고 스크린 너머 작은 불빛으로 흩어집니다. 작가는 작은 불빛이 된 타인의 신호를 모아 깃털, 돌, 소리, 진동과 함께 〈흩어진 창문들〉(2026)을 구성합니다. 나의 얼굴에 겹쳐지는 타인의 신호들로 인해 시선이 나에게서 주위로 넓어집니다.

 

이희경은 시간에 덮여 자연스럽게 휘발되는 사실들을 들여다보고, 그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입니다. 강도아 선생님의 증언을 토대로 제작된 〈뇨냐 Nona〉(2026)는 그 삶이 있었다는 것, 우리가 함께 들어야 할 목소리가 여기에 있다는 것을 상기시켜줍니다. 〈무제 霧堤〉(2026)는 ‘모든 것을 무릅쓴’ 이름을 호명하고, 이름조차 표백된 자들을 침묵으로 호명합니다.2)

 

전시장에 펼쳐진 문 밖의 목소리에 응답하는 방식은 각기 다를 것입니다. 방문하는 관람객 수만큼의 다양한 방식이 존재하겠지요. 다만 한 가지 당부를 드리자면, 이 경계에 섣불리 발을 올리지 마세요. 문지방을 절대 밟지 마세요. 혹여나 문지방에 발을 올리게 된다면, 더 이상 침묵으로 응답할 순 없으니까요.

 

글. 박지예


 



1) 코나카 치아키, 『ホラー映画の魅力―ファンダメンタル・ホラー宣言 (공포 영화의 매력 — 근본적인 공포선언)』, 이와나미 서점, 2003, 111쪽.


2)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수용소에서의 일들을 알리기 위해 찍은 네 장의 사진을 바탕으로 집필된 조르주 디디-위베르만의 저서 제목을 차용한 표현입니다. (『모든 것을 무릅쓴 이미지들』, 우윤성 옮김, 레베카, 2017.)


너머/넘어


문지방(Threshold)은 여러 문화권에서 삶과 죽음, 이곳과 저곳, 과거와 미래처럼 다른 시공간으로의 전환점으로 여겨졌다. 전시를 기획한 박지예 큐레이터는 <파묘>(2024)의 대사와 함께 서문을 연다. 영화 파묘에서 ‘문’은 이승과 저승을 구분 짓는 통로로서 등장한다. 장재현 감독의 오컬트 연작에는 그러한 접점이 종종 등장한다. <검은 사제들>(2015)에서 끊임없이 추적하던 악마의 ‘이름’1)과, <사바하>(2019)에서 존재를 부정당한 ‘그것’2)이 <파묘>(2024)의 ‘문’과 비슷한 장치일 것이다. 이러한 장치들은 참과 거짓을 혼동시키고, 일종의 경계로서 밖에서 안으로 침략하려고 하는 악의 존재나 그것이 언제 올지 모른다는 공포감을 조성한다. 동시에 가장 나약한 자리를 무너트리는 것들, 발전이라는 명목을 앞세워 저질러지던 악행, 그리고 그 사이에서 누락되거나 잊히는 존재들을 가시적으로 소환한다. 영화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본 전시가 문지방이라는 경계를 통해 두 세계를 가르는 듯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이 세계를 이분법적으로 나누려는 시도가 폭력이 되는 과정과, 경계 밖의 삶에 대해 들여다볼 여지를 주었기 때문이다.


전시는 비물질인 귀신조차 넘지 못하는 공고한 경계에 대해 생각하며, 영역 밖으로 밀려났거나 혹은 돌아오지 못한 존재들을 재조명한다. 동시에 “문밖의 목소리는 어쩌면 무서운 존재가 아니라 비가시적인 곳에 위치하는 존재가 내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라는 기획자의 질문처럼, 전시는 기존의 시각을 의심해 보고, 새롭게 전환해 볼 것을 제안한다. 문지방을 뜻하는 라틴어 리멘(limen)은 리미널(liminal)의 어원이기도 하다. 리미널 스페이스는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은, 한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넘어가는 사이의 공간으로, 머무름과 이행이 동시에 발생하는 자리이다. 그런 의미에서 전시가 제시하는 문지방은 경계가 환경에 따라 임시적이거나 가변적이고, 익숙한 시선을 새로운 것으로 환기할 가능성을 내비치기도 한다. 전시는 각자의 시선과 목소리를 통해 '안과 밖'에 대해 이야기해 보고, 밖으로 밀려난 사람들이 다시 모여 안을 이루는 과정을 그린다. 전시는 경계의 모호함, 정체성으로서의 공간과 영토, 온전한 귀향을 이루지 못한 사람들과 타지에 정착하려는 사람들, 재난과 폭력의 희생자에 대한 연민과 죄책감, 혹은 배척과 환대의 얼굴을 네 명의 작가를 통해 다양하게 들여다본다.


김영현은 모호한 감각과 학습된 상징성의 관계와 그 틈새에 관심을 가져왔다. 결코 같아질 수 없는 양 극단의  관계와 경계를 들여다보며, 다름에도 불구하고 이어져 있고 서로 끊어질 수 없는 것들을 발견해 나간다. 김영현의 꿈과 현실 사이에서 떠올랐다가 흩어지는 이미지들에 집중해 본다. 꿈은 심상으로서 언제나 자신에게 내재되어 있음에도 현실로 넘어오지 못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꿈을 발현하는 것은 실존하는 감각들이다. 회화는 정신적으로 이어져 있지만 물리적으로는 부재하는 감각들을 화면을 매개로 소환한다. 촘촘하고 얇은 지지체 위에 그려진 밝고 밀도 있는 화면은 현실과 환상의 거리를 좁혀 보려는 작가의 시도를 드러낸다. 이번 전시에서는 어깨와 어깨, 얼굴과 얼굴, 손과 손 사이의 형태를 통해 온전히 포개질 수 없고 결코 같아질 수도 없는 두 관계에 대한 탐구를 이어나간다. 한 사람의 두 손도 서로 다른 모양을 하고 어떠한 몸도 완전히 포개지지 못하고 틈새를 만들어낸다. 하지만 그 다름과 차이가 두 대상이 서로 맞닿았다는 사실마저 지우지는 못한다. 김영현의 회화는 현실과 비현실, 비물질과 물질, 과거와 현재가 각자 아득한 곳에 자리할 뿐 여전히 이어져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보게 했다.


이희경은 외면된 역사와 지워진 이름들을 호명한다. 소거된 역사는 독특하게도 작가가 교류와 접점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발견된다. 작가는 한국인으로서 한국에 살면서도 여전히 이방인으로 여겨지는 이주여성들의 삶과, 고향에 돌아왔지만 환대 받지 못하고 이름마저 지워진 위안부의 삶과 역사를 추적한다. 작가는 한국에 거주 중인 인도네시아 이주여성들의 삶을 우연히 접하고 배우게 되었다. 이후 연구자이자 친구로서 이주 여성들의 미시사를 탐구하며, 문화적, 역사적으로 유사하거나 교류되는 접점을 찾아나가기 시작했다. 2023년 인도네시아를 방문한 뒤, 동남아에도 강제 동원된 위안부가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고향을 떠났다는 기록은 남아있지만 이후의 행보를 알 수 없고, 환대 받지 못한 채 이름마저 지워진 이들의 삶과 역사를 추적한다. 〈뇨냐(Nona)〉(2026)3)는 인터뷰를 토대로 강도아님의 기억에서 사라진 순간을 재구성한다4). 영상은 역사와 사회로부터 소거된 존재들을 조명하지만, 결코 나약하게 그려내지 않는다. 인터뷰와 작업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주체적이고, 자신만의 단단한 의지를 갖고 있다. 아직 발아하지 않은 작은 씨앗처럼5), 작고 잘 보이지 않지만 그 안에 꺾이지 않는 희망과 가능성을 품고 있다.


송지유의 작업은 눈앞의 일상과 보이지 않는 세계가 함께 존재함을 생각하게 한다. 작가는 일상이라는 이름 아래 희미해지는 것들을 작업 속에 담아 돌본다. 지금까지 송지유에게 집은 임시로 머물다가 떠나가는 장소였다. 보따리처럼 머무는 자리에 펼쳤다가, 때가 되면 그곳에서의 시간을 담아 다른 자리로 옮겨간다. 어느 곳보다도 밀접한 곳이지만 단 한 번도 소유한 적 없는 장소들이다. 뿌리내리지 못한 채 부유하는 공간에 대한 이야기를 전함으로써 안과 밖의 경계에 질문한다. 작업은 계단이나 집, 혹은 실내 어딘가에서 본 듯한 익숙한 구조를 드러내기도 하고, 나뭇조각 속에 태아처럼 웅크린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아이는 집을 지으며 생겨나고, 집을 떠날 때 태어난다. 그리고 살아가면서 마주하는 시간과 세계를 흡수하며 새로운 집을 찾아 나간다. 송지유는 정착을 원한다. 물리적인 정착뿐만 아니라 정서적인 정착과, 온전한 자신만의 언어를 통해 스스로를 써 내려가는 태도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나만의 공간을 갖는다는 것은 온전한 나 자신을 갖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경계와 보호를 떠올림과 동시에, 일상을 이루는 모든 것들이 작고 사소한 관계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생각해 본다.


오로민경은 시선을 통해 경계를 두고 마주한 서로를 잇는다. 세상은 시선이 닿을 수 있는 한 길고 멀리 이어질 수 있다. 집에서도 달의 뒤편을 볼 수 있고, 인터넷과 스마트폰이 발전하며 세상은 더 좁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많은 것을 보고 접할 수 있게 된 만큼 놓게 되는 것도 많아진 듯하다. 뉴스와 미디어에서는 수시로 전쟁과 재난에 대한 소식이 들려온다. 스크린을 통해 먼 거리의 소식에도 동요할 수 있는 세상이 되었지만, 긴 거리를 건너 온 소식들은 때로 화면에 맺히는 빛에 그쳐버리기도 한다. 작가는 흩어지는 목소리들을 신호로 모아, 별처럼 반짝이는 불빛 속에 담아본다. 스크린(screen)은 원래 가림막을 뜻하지만, 현대 사회에서는 많은 정보가 오가는 통로로서 받아들여진다6). 전시에 설치된 투명한 패널은 공간을 가르는 경계이지만, 나의 모습을 반사함으로써 잠시 동안 여러 신호 속에 함께 머물게 하는 통로가 되기도 한다. 오로민경은 관객을 이야기의 바깥이 아닌 흐름 속으로 초대하고, 막이라는 경계를 가운데 두고 마주 앉은 우리가 서로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느껴볼 수 있게 한다. 바라봄으로 이어져 외면할 수 없게 된 타인의 고통을 마주하며,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무용해 보이는 다정함도 온 힘을 다해 모아낸다면 이 세상을 지킬 수 있지 않을까.


전시는 경계라는 개념에 질문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해, 대립, 정착, 배척, 사회적 사각지대와 같은 현실적 고민으로 질문을 확장한다. 경계를 바라본다는 것은 그 경계 밖에 놓인 존재를 바라보는 일이기도 하다. 《문지방을 밟지 마세요》는 연대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연대는 하나가 우위에 서서 베푸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르다는 것을 받아들이면서도 서로를 깊이 바라보며 이해해 보려는 일일 것이다. 전시는 경계로 인해 타자화 되어온 존재들을 단단하고 생동력 있는 존재로서 그려내고, 바라볼 용기를 전해준다. 그리스 신화에서 메두사는 눈이 마주치는 이를 돌로 만들고, 페르세우스에 의해 참수된 괴물로 여겨지지만, 식수(Hélène Cixous)는 그를 아름답게 웃음 짓는 능동적인 존재로 그려낸다7). 이처럼 막연하여 두렵던 세계를 새롭게 볼 수 있지 않을까. 전시는 비가시적이고 배척되어 왔지만, 강인한 의지를 지닌 존재들을 조명한다. 경계 너머의 존재를 다시 보기 위해 끊임없이 사유와 모색을 이어나가는 일은 미술과 전시가 취해야 할 중요한 태도일 것이다. 이제 문밖의 목소리에 다시 귀 기울여 보자.


글. 문소영 (독립 기획자)


1) 이름은 한 존재의 정체성과 소속을 나타낸다. <검은 사제들>에서 이름은 그 존재를 호명 가능한 것으로 만들어 권위 아래 복속시킨다.

2) 기이한 모습 탓에 가족에게 이름조차 받지 못한 채 '그것'으로 불리며 존재를 부정당한 인물이다.

3) 고 강도아님은 일제 강점기에 취업 사기를 당해 대만과 인도네시아로 위안부로 끌려가는 피해를 겪었다. 당시의 충격으로 많은 것을 기억하지 못하지만, 인도네시아에 머물던 시절 자신이 '뇨냐'라고 불렸던 것만은 어렴풋이 기억한다. 뇨냐는 아가씨를 뜻하는 인도네시아어 ‘Nona’를 떠올리게 하는 한편, 기억 저편에서 뭉개진 채 떠오르는 이름처럼 들리기도 한다. 당시 위안부 피해 여성들은 <남방 조선 출신자 명부>에 해외에 파견된 임시 간호사로서 기록되어 있다. 강도아님의 이름도 그중 한 명으로기록되어 있어, 이 자료는 취업 사기의 증거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참고자료: 이희경 작가 노트/ 김순종, 「취업사기에 ‘위안부’로…하동출신, 고 강도아 할머니」, 투데이 서경, 2024.)

4) “영상은 강도아 선생님이 인도네시아 발릭파판에 강제동원되었던 당시를 묘사한 구술의 일부분을 각색하여 폭력과 트라우마로 거의 휘발되어버린듯한 그의 시간과 그중 인도네시아 발릭파판에서의 순간을 드러내는데 장면을 할애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지금의 너머에 당신이 있었다는 것. 여기 모든 살아있는 것들이 그 누적된 죽음 위를 걷고 있음을 이야기한다.” (이희경 작가노트에서 발췌, 2026)

5) 작업에는 씨앗이 등장한다. 작은 체구이지만 강인한 내면을 가졌던 고 강도아님을 상징하기도 하고, 내재된 가능성과 뿌리 내릴 수 있다는 강인한 희망을 떠올리기도 한다.

6) 〈흩어진 창문들〉 오로민경 작가 노트 참고, 2026

7) 엘렌 식수, 『메두사의 웃음』, 이혜인 옮김, 마티, 2024 (원서: Hélène Cixous, "Le Rire de la Méduse," 1975).

엘렌 식수, 「출구」, 엘렌 식수, 카트린 클레망, 『새로 태어난 여성』, 이봉지 옮김, 나남, 2008. 식수는 「출구(Sorti)」를 통해 서구의 이분법적 사고에 의해 수동적인 존재로 여겨지던 여성성과, 여성의 성을 정복해야 할 '검은 대륙'으로 바라본 프로이트의 남성중심적 사고를 비판한다. 『메두사의 웃음』 프로이트의 『메두사의 머리』(1922)를 비판적으로 전복한다. 2026년 현재와 식수가 여성적 글쓰기를 선언했던 1970년대 프랑스 사이에는 세대적·문화적 괴리가 있지만, 그럼에도 이 글에서 식수의 언어를 빌리는 이유는 억압받거나 지워진 존재들에게 힘을 보태고, 이를 자신만의 언어로 발화해 보려는 작가와 기획자의 실천과 맞닿아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